사물의 외형과 활동을 관찰하여 법칙을 발견하고 이해하며 적용하도록 도움을 주는 지식은 ‘과학’의 영역에 속하고, 지혜는 ‘철학’의 영역에, 그리고 진리는 ‘종교’의 영역이다. 지식은 ‘사실’을 다루고, 지혜는 ‘관계’를, 진리는 ‘가치 실체’를 다룬다.
지식이 철학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관계에 도움을 주는 속성을 지닐 때 이러한 지식을 ‘지혜’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지식’과 ‘지혜’는 연결되어 생명력을 발휘하게 된다. 지혜로 나아가지 못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위험성이 있고 그로 인해 자신과 남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진리는 지혜와 짝을 이루어 또 한 차원 다음 단계로 나아가 실제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 내면으로 들어갈 뿐 아니라 영적인 실체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체험하게 하는 데까지 인도하는 것이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갠지스강은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굽이쳐 올라오다가 동쪽으로 빠져나간다. 이러한 지형은 힌두교 시바신 이마에 있는 반달을 상징한다. 힌두교적 표현으로 ‘아내(갠지스강)가 남편(바라나시)을 감싸 안으며 탑돌이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대표적인 성지가 됐고, 90% 이상의 힌두교도들은 죽은 뒤 바라나시에서 화장되길 원한다.
동이 트는 오전 6시 30분인데도 성스러운 물로 목욕하는 순례객들은 갠지스강에서 하는 목욕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해주고 정화도 시켜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연 그런지 의문이 들었다.
힌두교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방대한 의례, 수행체계, 행위 형태, 교리, 설화, 성전 등을 갖고 있고, 생활 규범, 도덕, 사회관습, 규범의 총체를 말하다 보니 종교라기보다는 인도인의 세계관에 가깝다.
힌두교도에 대한 정의도 분명치 않을 만큼 비정형적이며, 지도자도 없는 비조직적인 종교다. 3000년 넘게 인도인의 의식 세계를 지배해왔으면서도 창시자나 율법이 없다. 힌두교의 신은 ‘300만 혹은 3억’이라고도 하며 힌두교도의 숫자에 맞춰 10억에 달한다는 얘기도 있다. 본래 신은 하나이지만 사람의 능력과 수준과 생각에 따라 다른 형태로 숭배되는 것이다.
힌두교에는 수천 년의 역사와 넓은 영토, 어마어마한 인구가 얽혀 사는 인도의 복잡다단한 특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특히 다르마(Dharma, 정의 혹은 의무)에 따른 생활과 최고 정신을 탐구하는 생활 철학적인 종교이기도 하다. 아무리 인도인 시각을 갖고 접근하려고 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피안(현세가 아닌 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강가(Ganga)에서 매일 성스러운 물로 목욕하고 빨래하고, 양치하고, 마시고 그리고 또 화장하고, 수장하는 그들을 과학의 영역으로 생각하거나 우리의 얄팍한 지식의 잣대로 그들을 판단해서는 안 될 듯하다. 그들에게 과학이나 지식이나 위생은 인간의 영역이고 강가는 그들이 살아온 삶이요 세계관이요 가치관이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그들과 함께 수천 년을 존재해 왔다. 우리의 눈으로 그들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오늘도 Ganga에서 그렇게 온몸을 담그며 하루를 시작한다.
권오기 여행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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