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건봉사와 ‘사랑하는 까닭’

2024-10-21

이영옥, 수필가

금강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건봉사로 향했다. 강원도 고성에서 사찰로 들어가는 길에 설치된 군사시설물이 분단국가라는 현주소를 절감하게 한다. 천연 숲이 우거지고 무궁화 배롱나무가 화룡점정을 찍는 이곳은 한동안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육환장(중생을 깨우치는 지팡이)을 쥔 사명대사 동상이 웅장한 건봉사로 들어갔다.

6세기 신라 아도화상이 창건한 건봉사는 8세기에 최초로 만일(萬日) 염불회를 열어 아미타도량이 됐고, 이 기도는 현재에도 남북통일을 서원하며 봉행 되고 있다. 조선이 척불정책 중에도 국운을 기원하는 원당으로 삼았던 거찰로, 임진왜란에 사명대사가 6000여 명의 승군을 일으켜 그 밥 준비에 건봉사 냇가가 쌀뜨물로 하얗게 뒤덮였다는 일화가 있다. 대사는 일본과 외교담판을 해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을 데려온 탁월한 외교가이기도 하다. 외교전쟁시대인 요즘 더욱 우러러보이는 선사이다.

무지개 형상의 아름다운 능파교 건너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 삼배를 올리고 나오다가 연못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초록 연잎 가득한 수면에 붉고 흰 연꽃이 소담하고 나비 같은 노랑어리연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이 고운 풍경에 갑사 한복 꾸미고 들어가면 나도 한 폭의 실경이 될 수 있을런가? 호접지몽을 꿈꾸다 문득 깨어 황망히 불이문으로 향했다.

불이문을 나선 절 마당에 사명당과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기념관 있다. 이 호국사찰이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투사 만해 한용운과 함께했다. 만해는 건봉사에 봉명학교를 세워 청년들의 민족정신을 키우고 인재를 양성했으며, 30세에 사찰의 후원을 받아 일본으로 갔다. 잠깐이었지만 신문물을 시찰,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수강했고 귀국 후 ‘조선불교유신론’을 출간했다. 불교의 낡은 제도를 개혁해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실 세계에 실현하자는 논지의 이 저서는 불교뿐만 아니라 오늘날 사회 전반에 외치는 선사의 사자후이다.

기념관 옆 시비에서 가슴 따뜻한 만해의 ‘사랑하는 까닭’을 만났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만해의 시 앞에서 나는 늘 방황한다. 시대를 의식한 계몽적 해석과 문학으로서의 미학적 풀이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의 ‘당신’은 망설이지 않고 ‘사랑하는 이’로 부른다. 거칠게만 보이는 투사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백발도 눈물도 그리고 나의 죽음까지도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시인이 아름답다.

금강산 건봉사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군사시설물을 다시 만났다. 사명대사가, 만해 한용운이 우리를 향해 육환장을 철렁인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