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 않고 밀고가니 행운이”...보석같은 작품 발굴하는 출판사들

2025-10-21

몇 페이지를 넘겨도 한 문장이 끝나지 않는 ‘만연체’, 한국에 생소한 헝가리 문학. 소규모 출판사 알마가 투자한 작가이자,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71)의 특징이다. 알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호명되자마자 ‘생소한 작가를 뚝심 있게 소개한 출판사’라는 평을 받으며 이목을 끌었다.

출판사 입장에서 이런 선택은 모험과도 같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해외 작가 작품의 경우 베스트셀러에 오르기 어려워 판권료와 번역료 회수도 힘들기 때문이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크러스너호르커이 작가의 『사탄탱고』는 노벨 문학상 수상 전까지 하루 한두 권 판매되는 수준이었다. 수상 결과가 발표된 9일 이후에야 5일간 약 2600부가 팔렸다.

알마의 안지미 대표는 “크러스너호르커이 작가의 작품은 낯선 작가의 낯선 문학을 소개해보자는 문학 시리즈인 ‘알마 인코그니타’의 일환으로 출간됐다”고 소개했다. 안 대표는 “이 시리즈로 소개되는 작품은 대부분 접근성이 낮아 판매가 어렵긴 하지만, 지치지 않고 밀고 나가니 이런 큰 행운이 온다”고 소감을 전했다.

안목 발휘하는 소규모 출판사…노벨문학상·토니상 수상자 작품 첫 소개

알마와 같이 낯선 작가의 작품을 소개해 온 출판사는 여럿이다. 특히 소규모 출판사의 역할이 크다. 설득해야 하는 구성원의 수가 적고, 판매율이 저조하더라도 대표의 ‘뚝심’으로 출간을 밀어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굴하는 경우나, 해외에선 널리 알려진 작가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경우도 나온다.

프랑스 문학을 전문으로 출간하는 1인 출판사 레모는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 작가를 미리 알아봤다. 레모는 노벨문학상 선정 전 에르노 작가의 판권을 4권 확보하고 출간을 준비 중이었다. 2021년 출간한 에르노의 소설 『얼어붙은 여자』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곧바로 증쇄에 들어갔고, 수상 직후 1년간 판매 속도가 약 2배 증가했다. 번역가 출신의 윤석헌 대표는 “조르주 페렉, 아니 에르노, 파트리크 모디아노 등 좋아하는 작가를 포함해 델핀 드 비강처럼 사회문제를 다룬 프랑스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며 “프랑스 문학이 어렵다는 편견을 깨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소규모 출판사 뮤진트리는 2014년 맨부커상 후보에 오른 미국의 소설가 시리 허스트베트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곳이다. 현재까지 허스트베트의 작품만 아홉권을 출간했다. 지난해엔 1998년 토니상을 받은 프랑스의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희곡 『대학살의 신』, 『스페인 연극』, 『아트』를 한 번에 냈다. 뮤진트리 박남주 대표는 “매년 약 8~10권의 문학·인문·예술서를 내고 있다”며 “한국문학은 1~2권 정도 낸다”고 소개했다. 이외에도 엘리자베스 비숍, 라이너 쿤체, 페르난두 페소아 등 해외문학을 꾸준히 출판 중인 출판사 봄날의책, 예술서적을 포함해 ‘제안들’ 시리즈로 다양한 해외문학을 소개 중인 출판사 워크룸프레스 등이 있다.

낯선 작가의 책을 발굴하는 과정은 타 출판사와의 차별화를 위한 판매전략으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이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출간에 의의를 두자’는 사명감에서 비롯한 선택이기도 하다. 뮤진트리 박 대표는 “사회적 시선과 깊은 사유가 담긴 책을 내려고 노력한다. (잘 안 팔리더라도) 안목과 뚝심으로 버티고 있다”고 전했다.

해외문학 지원사업 부족…‘문학나눔’ 해외문학 지원 규모 절반으로 ↓

출판사들은 “문학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해외문학 출판 지원체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출판사가 해외문학 작품을 출간할 때 받을 수 있는 지원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출판 지원사업인 ‘세종도서’(교양·학술 지원), ‘문학나눔’(문학 지원) 사업과 해외 대사관 차원의 선인세·번역지원 프로그램 정도다.

이중 우수 출판물을 선정·보급하는 ‘세종도서’, ‘문학나눔’의 경우 예산이 줄고 있다. 2023년엔 두 사업이 합산 140억원 규모였다가, 지난해 115억원 대로 급감했다. 올해 다시 예산을 늘렸으나 131억원 대에 그쳤다. 한국문학 지원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업이라 해외문학 지원 한도는 15%(문학나눔), 30%(세종도서)로 낮다. 출판사 은행나무 심하은 해외문학팀 주간은 “세종도서 또는 문학나눔에 번역문학 부문이 신설되고 (전체) 지원 규모가 확장돼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언어권 작품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프랑스 대사관 문학과로부터 ‘번역 지원’과 ‘선인세 지원’ 프로그램에 총 세 차례 선정된 경험이 있는 뮤진트리의 박 대표는 “(대사관의) 지원을 받게 되면 확실히 도움이 된다”고 했다. 대사관마다 지원 방식은 다르나, 출판사들에겐 두 프로그램이 가장 도움이 된다. 박 대표는 “선인세 지원 프로그램의 경우, 공고 시점에 선인세를 지불하지 않은 책이어야 해 아예 지원을 못하는 해도 많다. 대사관이 관심을 갖는 주제 등도 고려해야 해 큰 기대를 걸긴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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