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헴프(hemp, 산업용 대마)에서 의약품 원료(CBD)를 추출한다는 칼럼을 쓴 뒤 지방정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도 차원에서 사업 추진을 원한다는 요지다. 헴프는 기후·환경·자원·경제·사회 복합위기시대에 반드시 살려내야 할 산업이다. 고대로부터 헴프 경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왜 소멸됐는지, 왜 재평가됐는지 들여다보면 답이 나온다.
헴프는 기원전 8000년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4000년부터 중국에서 재배했다. 우리도 삼국시대부터 삼베·어망·밧줄·종이의 원료였다. 1215년 영국의 마그나카르타(대헌장) 원본은 헴프 종이였다. 1535년 헨리 8세는 농지의 4분의 1 이상에 헴프를 키우도록 했고, 당시 옷감의 80%는 헴프였다. 1619년 미국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의 최초 식민지에서도 헴프 재배가 의무화된다. 초대, 3대, 5대 대통령 워싱턴, 제퍼슨, 먼로는 헴프 농부였다. 1776년 독립선언문과 성조기, 세금과 화폐도 헴프일 정도였다. 1914년 10달러짜리 지폐는 헴프 종이에 헴프를 수확하는 그림이었다.
고대부터 헴프는 주요 경제작물
마리화나 규제에 엮여 시장 붕괴
기후복합위기 시대 헴프 재평가
지속가능한 헴프 지역경제 구축
그러던 헴프 경제가 1910년대 내리막길을 걷는다. 조면기 보급으로 면화산업이 약진하고, 증기엔진이 헴프로 만든 돛을 대체하면서였다. 반전의 기회도 있었다. 1916년 미 농무부(USDA)가 목재에 비해 헴프가 펄프를 4배 더 생산할 수 있다 하고, 같은 해 헴프 재배의 힘겨운 노동 강도를 100배 줄이는 조면기가 개발된 것이다. 그럼에도 헴프 생태계는 회생하지 못한다. 나무 펄프 제지업, 석유산업, 합성섬유 개발이 헴프 산업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1930년대 마리화나 퇴치 캠페인과 1937년 헴프 제품에 중과세를 매기는 마리화나세금법 제정으로 시장은 붕괴한다.
1942년 헨리 포드는 차체를 헴프 플라스틱으로 만든 ‘Hemp Body’ 모델을 선보였다. 무게가 30% 가볍고 철보다 10배 강했으며, 헴프 에탄올로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장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장을 군수용 생산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한때 전시 군수용품 제조를 위한 ‘Hemp for Victory’ 캠페인으로 반짝했으나 종전 후 공장이 모두 폐쇄된다. 1950년대 헴프 대량재배는 맥이 끊긴다. 1970년 규제약물법은 헴프를 마리화나처럼 규제했다. 다시 1970년대를 휘몰아친 마약과의 전쟁에서는 소수인종과 청년층이 과도한 처벌을 받았다.
1998년 미 농무부는 농업·직물·리사이클링·자동차·가구·식품·제지·건축자재·미용에서 2만5000가지 이상의 헴프 제품이 생산된다고 발표한다. 2004년 헴프산업협회는 마약단속국(DEA)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연방법원은 헴프 측의 손을 들어준다. 2007년 50년 만에 헴프 재배가 재개된다. 2014년 연방정부는 농업법(Farm Bill)으로 헴프 파일럿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다시 2018년 ‘농업법 2018’로 헴프와 헴프에서 얻는 생산품이 합법화되고, 헴프가 규제약물 스케줄1 목록에서 빠진다. 2021년 아이다호 주를 끝으로 미국 50개주 모두가 헴프 재배를 허용한다.
미국에서의 헴프 역사를 살펴본 이유는 세계 흐름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헴프를 마리화나와 똑같이 규제한 것은 과학적으로 오류였다. 헴프는 향정신성·중독성이 없다. 국가별 차이는 있으나, 법적으로 마약 성분인 THC 함량이 0.3% 이하다. 규제로 묶인 탓에 연구가 축적되지 못했고, 비과학적 규제로 인해 ‘기적의 식물’과 ‘악마의 풀’ 사이를 오갔다.
미 농무부는 2019년 오리건 주립대 글로벌헴프혁신센터(GHIC) 설립을 지원해 ‘지속가능한 헴프 경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헴프 유통량은 2019년 49억 달러에서 2025년 266억 달러로 전망된다(MarketsandMarkets). 헴프처럼 환경친화적인 작물은 드물다. 이산화탄소 흡수력이 뛰어나 헴프 1t 재배로 공기 중 1.63t 탄소를 제거할 수 있다. 파종 후 4개월 내에 4m로 쑥쑥 자라며, 면화와 달리 살충제·제초제도 필요 없고, 물도 절반 정도면 된다. 뿌리가 2.7m까지 뻗어 토양 침식을 막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염된 토양의 탁월한 정화능력으로 성장기에 카드뮴 50%, 납 90%를 제거한다. 실제로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이후 1990년대 토양과 지하수 오염 처리에 헴프를 이용했다.
헴프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지속가능 산업 기반으로서 헴프가 재평가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이산화탄소를 가두는 헴프 콘크리트에 바이오연료와 플라스틱 제조도 결코 놓칠 수 없다. 헴프 산업의 동력은 법률과 규제에 달려있다. 우리나라는 엄격한 규제로 헴프규제자유특구사업이 추진되는 정도다. 그나마 복잡한 추진체계로 실효성이 떨어진다. 죽었던 산업을 살리려면 해야 할 일이 많다. 마리화나와의 혼동으로 사회적 인식도 부정적이다. 따라서 철저한 마약관리는 헴프 산업의 필수조건이다. 국민은 생산적이고 희망을 주는 정치에 목마르다. 정부와 국회는 헴프의 시대적·산업적 가치를 살릴 수 있는 ‘지속가능한 지역 헴프 경제’ 구축에 나서야 할 것이다.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