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마트그룹과 롯데그룹이 위기설에 휘말렸다. 두 그룹의 위기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1) 두 회사 모두 국내를 대표하는 유통 대기업이다.
2) 두 기업은 유통뿐만 아니라, 대형마트와 백화점들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규모의 부동산을 취득하여 큰 수익을 벌어들였다. 유통시장에서 과점적인 지위를 가진 공룡이면서, 동시에 상권을 개발해 시세차익을 얻는 부동산 개발회사였다. 그래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기업은 절대 망할 리가 없는 안전빵 기업이었다.
3) 그런데 두 회사 모두, 지난 몇 년간 알짜배기 부동산의 상당수를 매각해 왔다. 또한, 막대한 양의 부채를 발행했다.
4) 이렇게 땡긴 돈으로 공격적인 사업확장과 M&A를 시도했다가 폭삭 망했다.
5) 그러는 사이 본업인 유통업의 주도권은 쿠팡에 빼앗겼고,
6) 서브캐(보조)로 육성해 오던 건설사가 대규모 미분양 사태를 맞아 유동성 위기를 맞고 있다.
M&A실패 누적, 쿠팡의 약진, 그리고 건설사 미분양 사태. 이 세 가지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두 기업은 현재 매우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여기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재벌 3세가 곳간의 열쇠를 쥐자마자 뻘짓을 해서, 멀쩡한 기업을 말아먹었다. 결과적으로 이게 그렇게 잘못된 평가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소유와 경영이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기업에서 대규모 실패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오너가 져야 한다.
두 그룹의 수장 정용진·신동빈
출처-<뉴스1·롯데 자이언츠>
다만, 이렇게 단순화해서만 생각하기엔 두 기업이 무슨 생각으로 인수합병을 시도했고, 왜 그게 실패했는지가 잘 이해되질 않는다. 내가 유통전문가는 아니지만, 방구석에서 뇌피셜 돌린걸로 지금부터 한번 썰을 풀어보려고한다. 재미로 봐주셨으면 한다.
1. 월마트의 짠내 나는 초저가 전략.
유통업의 가장 큰 특징은, 상품을 직접 제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통업에서만큼은 좋은 상품을 잘 만들어, 경쟁자를 이긴다는 전략이 먹히지 않는다. 최근에는 다양한 자체상표(PB) 상품이 출시되고 있긴 하지만, 성공을 위한 기본조건은 좋은 품질의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통업의 본질은, 좋은 물건을 고객들에게 싸게 팔 수 있는지다.
기존에 유통비용을 낮추는 데는, 크게 3가지 방법이 있었다.
(1) 생산자로부터 물건을 싸게 산다.
(2) 물류비용 (생산지로부터 판매처까지 물건을 이동하는 비용)을 낮춘다.
(3) 마지막 유통단계 (마트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소매)에서의 비용을 낮춘다.
이 세 가지를 가장 성공적으로 달성해 왔던 것이 미국의 월마트이다. 월마트는 세계 최대의 소매업체이다. 월마트의 소매 매출은, 2위 아마존과 3위 코스트코의 매출을 합한 것만큼이나 크다.
(1) 이렇게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월마트는 제조사들을 압박해 상품의 매입비용을 낮춘다. 또한,
(2) 사업 초창기부터, 월마트는 물류센터와 IT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등 물류비용을 낮추는 데 진심이었다.
(3) 마지막으로 임대료가 비싼 도심이 아닌, 교외나 시골에 허름하지만 거대한 규모의 매장을 지어 유통단계에서의 비용을 낮춘다.
이러한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에, 월마트는 세계 최대의 소매 업체가 될 수 있었다. 다만, 월마트의 거대한 규모나 지금까지 구축해 놓은 인프라만 보고서 월마트의 성공을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아마존을 비롯한 이커머스가 활개 치는 지금까지도 월마트는 미국에서 시장점유율을 (다소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다. 반면, 국내 대형마트들은 거대한 덩치와 여러 이점에도 불구하고 쿠팡에 밀리고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이걸 이해하려면, 먼저 월마트가 천하 통일을 이루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월마트는 1902년 아칸소주로부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경제를 이끌어가는 것은 동부와 서부 해안에 있는 연안 도시들이다. 그 외로는, 걸프만에 있는 텍사스주가 미국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의 대도시는 항구를 끼고 발전해 왔다. 아칸소는 중남부 내륙에 위치해 있다. 주요 대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항구가 없어 물류에 유리한 조건은 아니다. 아칸소는 미시시피 (아칸소와는 강하나를 마주 보고 붙어있다) 주 다음으로 소득이 가장 낮은 깡촌이다.
이런 깡촌에서 월마트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월마트는 이미 유통 경쟁이 치열한 대도시 주변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낙후된 주변부로부터 시작했다. 이 지역들은 경제적으로 뒤처져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현대적인 대형마트나 물류망이 갖춰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무주공산이었다.
아칸소주 위치
출처-<구글맵>
월마트는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1970-80년대 월마트는 대도시지역이 아니라, 미국 중서부와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미 대형마트가 잘 갖춰져 있는 상권에 가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느니, 아직 대형마트가 없는 시골에다가 계속 신규 매장을 여는, 빈집 털이 전략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서부·남부의 매장은 수익성이 매우 좋았다. 월마트는 많은 지역에서 주민들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대형마트였다. 독점적인 지위를 바탕으로 강력한 가격결정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초기 월마트의 경쟁력과 비교우위는, 절대적인 규모가 아니라, 한정된 지역에 역량을 집중시키는 것한테서 나왔다. 70~80년대 월마트는 규모 면에서는 다른 전국구 사업자들보다 크지 않았다. 큰 매출이 나오는 대도시 주변에선 월마트가 출점을 자제해왔기 때문이다. 그 대신, 중서부와 남부 지역에 역량을 집중한 덕에 수익률은 압도적으로 높았다. 월마트는 경쟁이 적은 지방에서 머물면서 꿀을 빨았다. 그리고 이렇게 거둬들인 이익을 물류 시설과 현대적인 재고관리시스템에 재투자함으로써, 유통비용을 혁신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거대한 트럭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물류창고나 바코드만 찍으면 재고와 가격정보가 나오는 시스템. 지금은 어느 대형마트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월마트가 혁신적이었던 부분은, 이런 시스템을 처음 개발해서가 아니라, 이걸 전면적으로 밀어붙인 스케일에 있다.
다른 경쟁자들도 비슷한 시스템을 도입하면 물류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걸 알았을 거다. 그런데 엄두를 내지 못했던 건, 이러한 시스템에 구축하는 비용을 지급할 만큼의 자본이 충분히 축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매일매일 할인과 쿠폰을 가지고 주변 마트들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업그레이드를 추진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작은 전투를 치르느라, 내정에 신경 쓰지 못한 거다.
반면 월마트는 구석에 틀어박혀, 내실을 쌓을 수 있었다. 소비자에게 좋은 물건을 남들보다 싸게 판다. 이는 아주 단순하지만, 유통기업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전략이다. 월마트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남부와 중서부에 선택적으로 집중함으로써 유통비용을 낮췄다. 여기서 발생한 이익은 물류망과 IT기술, 재고관리시스템에 재투자하여 다른 기업들은 쉽게 따라 할 수 없을 수준으로 유통비용을 낮췄다. 이런 준비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월마트가 전국구로 사업을 확장했을 때도 경쟁자들보다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월마트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도시에 진출한다. 월마트의 물류망과 전산망은 당시 경쟁자들보다 최소 한세대 이상 앞선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월마트조차, 대도시 상권 진출 초기부터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기존 상권의 경쟁은 치열했고, 경쟁 회사들은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월마트에 맞서 싸웠다. 출혈경쟁에 맞대응하느라, 월마트의 신규 매장의 수익률은 사업초기 저조했다.
출처-<월마트>
대도시 신규 매장에서 수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월마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남부·중서부 지역의 기존 매장에서 계속 안정적인 수익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경쟁자들은 제 살을 깎아가며 할인 쿠폰을 뿌렸는데, 월마트는 단 한 번도 손실이 본 적이 없다. 당시 상황은, 경쟁자들이 월마트를 물리칠 생각으로 최후의 돌격 (출혈경쟁)을 감행했는데, 월마트 본진에는 희생된 병사보다 앞서 더 많은 증원부대 (중서주 지역에서 발생한 이익) 가 파견되는 꼴이었다.
원래 방어만 해서는 전쟁에서 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유통업계에는 보복출점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이미 충정로에는 딴지마켓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인데, 여기에 경쟁자가 부르르마켓을 출점했다고 가정해 보자. 딴지마켓이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은, 부르르 마켓 본점 근처에 보복 출점을 하는 것이다. 네가 먼저 내 구역을 침범했으니, 나도 네 나와바리로 쳐들어간다는 전략이다. 이런 보복 출점을 당하면, 부르르 마켓은 기존 시장을 방어하기 위해 추가 출점에 소극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월마트의 본진은 앞서 말한 대로, 깡촌인 아칸소다.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인데, 월마트는 여기에 온갖 최첨단 물류센터를 깔아놨다. 전쟁으로 치면, 가뜩이나 험준한 지형에 기관총 포대로 도배해 놓은 상태이다. 이런 곳에서 경쟁 대형마트가 쳐들어가서, 월마트와 경쟁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반면, 전국에 유통망을 확보한 월마트가 대도시에 있는 다른 경쟁자들의 본진을 공격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월마트 1호점
출처-
월마트는 철저히 외곽을 공략하여, 대도시를 하나씩 점령해 나간다. 가뜩이나 물류비용도 낮은데 (물류센터 및 현대화된 재고관리시스템 도입), 철저하게 임대료가 저렴한 교외 지역에 매장을 여는 것이다. 다른 경쟁 회사들은 비싼 임대료를 내가면서, 도심에 멋진 매장으로 체면을 차릴 때, 월마트는 혼자 땅값이 싼 외곽에다 매장을 열었다. 월마트 매장은 제대로 된 인테리어랄 것도 없이 후지고, 위치도 차가 없으면 찾아가기 힘들 정도로 후지다. 하지만, 월마트 매장은 바로 이렇게 허접하고 불편하기 때문에 운영비가 저렴하다. 월마트는 이렇게 아낀 유통비용을 월마트는 고객들에게 낮은 가격으로 되돌려줬다.
좀 더 쾌적한 매장에 가서 제값을 주고 물건을 살 것인가, 아니면 매장이 불편하더라도 싼 곳을 찾아갈 것인가. 대부분 소비자는 둘 중의 후자를 선택했다. 불평은 하면서도, 월마트 매장의 가격은 거부할 수 없었던 거다.
압도적인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월마트는 대도시 상권들을 하나씩 함락시켜 나갔다. 워런 버핏 같은 위대한 투자자들의 말을 듣다 보면, 경제적 해자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해자는 원래 공성전에서 외부 침략자가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다. 더 많은 시장점유를 차지하기 위한 기업 간의 경쟁은 기본적으로 전쟁이다. 경제 전쟁에서 경제적 해자라는 것은, 다른 기업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비교우위를 갖췄다는 것을 뜻한다.
월마트는 물류센터에 자율 지게차를 도입,
작업자 안전 강화·효율성 제고 중이라고 한다
출처-<월마트>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월마트의 경제적 해자는, 유통비용이 압도적으로 낮다는 데서 나온다. 월마트는 초창기 선택과 집중을 통해, 무주공산이던 미국 남부와 중서부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했다. 그리고 여기서 기른 힘을 바탕으로 유통 혁신을 달성, 미국 시장을 통일하였다. 이어지는 글에서, 계속해서 전쟁에 비유해서(수성과 공성, 경제적 해자) 어떤 기업이 승리하고 실패하는지를 설명해 나갈 것이다.
2. 알박기를 통한 국내시장 수성
한국 대형마트의 역사는 1993년 이마트 창동 1호점으로부터 시작한다. 당시에는 이미 월마트나 테스코 같은 성공사례가 존재했기 때문에, 한국의 대형마트는 이들 해외기업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는 식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당시에는 대형마트처럼 신선 식품과 잡화를 모두 한곳에서 구입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기존 재래시장과 번화가 상점은 복잡한 유통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그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대형마트는 외국대형마트의 물류설비와 재고관리시스템을 채택하여, 물류비용을 낮출 수 있었다. 적어도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사면, 덤터기를 쓸 일은 없었다. 국내 대형마트의 확장기는, IMF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진 국민의 소비 증가와 맞아들여 들어가며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부분 (마트의 크기, 포스기, 유통시스템 등)을 걷어내고 나면, 한국의 대형마트는 시작부터 월마트와 상당히 달랐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마트가 첫 매장을 도봉구 번화가인 창동에 열었다는 데서 알다시피, 국내 대형마트는 부도심 위주로 출점하는 전략을 펼쳤다. 국내 대형마트 매장은 땅값이 비싼 강남 한복판에 백화점처럼 서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국 월마트처럼 차를 타고만 갈 수 있는 외진 곳에 매장이 있는 건 아니다. 국내에 대형마트는 주로 서울 외곽 권이나 신도시 아파트단지 주변 같은 곳에 많다.
한국은 전 국민의 절반가량이 수도권에 몰려 살고, 대중교통이 발달해있다. 이런 현실에서 입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대형마트를 연다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실제로, 교외에 매장을 고수해 왔던 해외 대형마트들은 한국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2001년에 백화점·대형마트의 셔틀버스 운행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국내 대형마트들은 본격적으로 접근성이 좋은 도심지나 신도시 베드타운에 신규 매장을 열기 시작했다. 동시에 대형마트들은 백화점에서나 운영하던 문화센터를 도입하여 지역 주민들의 방문을 유도했다. 이게 별것 아닌 거 같아도, 아이 키우는 사람이나 취미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주기적으로 마트에 방문할 명분이 되기도 한다.
이마트 창동점(1호점) 전경
출처-<이마트>
한국형 대형마트는 접근하기 좋은 곳에 있다. 준수한 외관과 인테리어도 갖추고 있다. 백화점 식품관에 가는 정도의 특별한 느낌은 들지 않지만, 온 가족이 방문하기에 상당히 쾌적하다. 적당한 문화생활을 즐기기에도 나쁘지 않다.
그 대신, 한국의 대형마트는 그렇게 싸지도 않다. 위에서 언급한 장점들이 모두 유통비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품질에 물건을 판매하는 것. 이것이 한국 대형마트의 기본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는 그다지 나쁜 전략이 아니었다. 코스트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오프라인에서 초저가 전략으로 성공한 기업은 거의 없었다. 왜 그럴까.
그게 부동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시장에서는 인구 분포·대중교통으로 인해 입지적인 요소가 더 중요하단 얘긴 앞서 했다. 어떤 마트의 물건이 약간 싸더라도, 택시를 타고 가서 사와야 한다면, 가격 측면의 혜택을 소비자가 누린다고 보긴 어렵다. 그래서 오프라인에서는 잠재적 수요자가 많은 지역에 매장을 확보하는 데 대단히 중요했다. 국내 유통 대기업들은 부동산 문제에 있어서 매우 탁월했다.
우리나라에 대형마트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는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다. 아직 서울 외곽이나 경기도 지역의 땅값이 지금처럼 비싸지 않을 때다. 이 시기에 유통 대기업은 신도시 지역에 대형마트 부지를 많이 확보했다. 그리고 대형마트가 유행하기 훨씬 이전부터 국내 유통 대기업들은 전국 곳곳에 알짜배기 땅을 사들여왔다. 유통회사들의 영업 이익률은 5% 미만으로 생각보다 그다지 높지 않다. 그 대신 많은 현금을 만질 수 있다. 국내 유통회사들은 남는 현금으로 땅을 매입한 뒤, 부지에 상권을 개발하여 막대한 개발수익을 올렸다.
예를 들어, 롯데그룹이 서울시로부터 현재의 잠실 롯데월드타워 부지를 사들였던 게 1989년이다. 1989년은 잠실 롯데월드가 개장한 해이기도 하다. 롯데그룹이 보유한 잠실 지역 부동산의 가치는 두 차례 개발을 통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신세계그룹 또한 센트럴시티(호남선 터미널과 신세계백화점)를 인수한 이래 인근 고속버스터미널 지분을 계속해서 사들이고 있다. 최근에는 유통과 부동산을 결합한 스타필드 사업을 성공시킨 바 있다. 신세계와 롯데는 단순 유통회사가 아니라, 종합 부동산 개발회사라고 봐야 한다.
국내 대기업들이 풍부한 자본력을 활용하여, 부동산을 확보하고 그 위에 대형마트를 출점하는 전략은 시너지를 발생시켰다. 별다른 상업시설이 없던 지역에 대형마트가 세워지면, 그 주변 땅값도 덩달아 올랐다. 새로운 상권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격적인 부동산 투자가 자산 가격 상승기, 저금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대박을 터트린다. 부동산 가격이 떡상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임대료가 싼 곳을 찾아 임대로 매장을 여는 것보다, 위치가 좋은 부동산을 사서 그 위에 마트를 세우는 게 이득이었다.
최근의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타워·몰 전경
출처-<롯데물산>
좋게 말하면 부동산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고, 나쁘게 말하면 알박기를 한 것이다. 게다가 부동산 가격상승은 부수적인 효과를 발생시켰는데, 높은 땅값이 새로운 경쟁자들의 시장진입을 가로막은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대형마트를 열려면, 당연히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부동산 임대료가 급등함에 따라, 신규 사업자들의 매장 비용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반면, 이미 자기 땅을 끼고 있는 기존 사업자는 늘어날 임대료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인구가 밀집해 있고,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한국 시장에서는,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공간 (마트)을 운영하는 게 전체 유통비용에 큰 부분을 차지해 왔다. 그런데 국내 대기업들은 깔아둔 땅이 많아서 이러한 오프라인 경쟁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다시 말해, 전국 각지의 세워진 대형마트는 그 자체로 적의 침입을 막는 유통의 요새 역할을 한 것이다. 이미 유통 대기업들이 굳건히 장악한 국내시장에서, 새로운 사업자가 나타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3. 화약 무기의 등장
이러한 대형마트 전성시대를 끝낸 것은, 쿠팡을 비롯한 이커머스 기업들이다. 기존 대형 유통업체들에 거대한 오프라인 매장이 견고한 요새와 같았다면, 쿠팡의 로켓배송은 이러한 요새를 허물어버린 화약 무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온라인에서만 사업을 하는 이커머스 업체의 특성상, 굳이 임대료가 비싼 도심에 부지를 확보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제는 폰으로 터치 몇 번만 하면, 전국 어디서나 로켓배송을 받아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입지라는 요소가 사라지자, 가격이라는 요소만 남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유통업의 본질 그러니까 같은 물건을 얼마나 싸게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되었다. 쿠팡은 기존 어정쩡한 가격에 물건을 유통하던 대형마트보다 싼값에 비슷한 물건을 팔았기 때문에, 순식간에 성장할 수 있었다.
자 그러면 시계를 되돌려, 쿠팡이 세워진 2010년도로,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국내 유통 대기업들은 과연 이커머스 기업이 이렇게 성장할지 정말로 몰랐을까? 당연히 알았을 거다. 당시에는 이미 미국에 아마존이라는 성공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아마존 자리를 놓고 수많은 스타트업이 경쟁했는데, 그중 최종 승자가 쿠팡이 되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인터넷 쇼핑몰을 세운 건, 롯데쇼핑이다 (구 롯데닷컴, 현 롯데온). 신세계그룹도 기존의 이마트몰과 신세계몰을 통합하여, 2014년 쓱닷컴을 출시했다. 그러니까 롯데와 이마트가 이커머스 사업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쿠팡에 패배했다는 건 지나치게 단순화 해석인 것 같다.
롯데와 이마트가 이커머스 사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많다. 최근까지만 해도 수많은 계열사가 독자적으로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해 왔고, 물류망도 제대로 통합되지도 않았다. 상품 노출 페이지 또한 모바일시대에 맞지 않았다. 이래서야, 기존 상품을 온라인으로 옮겨놓은 것일 뿐, 제대로 된 이커머스라 부를 수도 없었다.
대부분 소비자가 이커머스 업체로부터 원하는 건, 저렴한 가격, 빠른 배송 그리고 자유로운 반품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1) 저렴한 가격과 (2) 빠른 배송 및 자유로운 반품, 두 가지는 양립하기 힘든 개념이다. 빠른 배송과 자유로운 반품은 매우 비싼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출처-<대한경제 24.02.06 기사>
빠른 배송을 해주려면, 고도로 자동화된 물류센터를 전국에다가 도배해야 한다. 고객이 주문하기도 전에 근처 물류센터에 미리 물건을 갖다 놓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물건이 나갈 수 있게 세팅이 되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택배 물류망만으로는, 엄청나게 다양한 물건을 조금씩 사가는 고객들의 주문을 처리할 수가 없다. 전부 갈아엎고, 이커머스에 최적화된 물류시스템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자유로운 반품 또한 엄청나게 비싼 서비스이다. 신선 식품은 물론이고, 일반 공산품들도 아주 약간의 하자가 발생해도 재판매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반품을 잘 안 받아줬다간 온갖 클레임이 들어올 게 뻔하다. 반품된 물건을 일일이 검수하고, 다시 재포장하는 데만도 막대한 비용이 발생한다.
그래서 기존 유통업체들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기존에 하던 대로, 택배 망을 이용해서 주문이 들어오면 물건을 고객에게 배송해 주고, 적당히 택배비 받고 적당히 반품은 번거롭게 하는 것이다. 원래 쿠팡 이전에 대부분의 온라인 쇼핑몰은 이렇게 운영을 했다. 롯데나 신세계는 온라인에서 폭리를 취하긴커녕, 제대로 된 이익을 낸 적이 없다.
쿠팡이 국내 이커머스 사업에서 승리했던 것은, 이 바닥에서 가장 미친놈이었기 때문이다. 쿠팡은 막대한 자금을 조달해 정말로 전국을 물류센터로 도배했고, 멤버십 고객들은 무료배송·반품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제품의 가격은 낮게 유지했다. 비싼 물류비와 반품비를 고객에게 전가하지 않은 것이다. 한마디로 고객들에게 퍼준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쿠팡은 막대한 적자를 봤다. 쿠팡은 작년까지 이익을 낸 적이 없다.
쿠팡은 ‘계획된 적자’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손실이 얼마가 나든, 모든 소비자가 사용할 법한 좋은 서비스를 내놓는 게 우선이라는 거다. 사업 초기 어느 정도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성장을 추구한다. 신사업에 도전하는 모든 기업이 한 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전략이다. 쿠팡이 다른 경쟁자들과 달랐던 것은 그 '스케일'이다. 쿠팡이 지금까지 본 누적적자 금액은 6조가 넘는다. 이게 얼마나 큰 금액인지 감이 안 올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 시총 6조 원이 넘는 기업이 70개가 안 된다. 이마트(1.8조)와 롯데쇼핑 (1.6조)의 현재 시총을 합쳐도 쿠팡이 지금까지 본 손실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다만 이는 지극히 거친 계산법임을 밝힌다. 이마트와 롯데쇼핑 주가가 최근 고점 대비 절반 혹은 그 이하로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쿠팡과 경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이렇게 쪼그라든 것이지, 원래부터 두 기업이 작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6조가 정말로 큰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리 승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한들, 매년 조 단위에 손실을 보면서도 계속 투자를 늘린다는 건 미친 짓이다. 아니, 일반 기업으로서는 이 정도의 자금을 조달할 수조차 없다. 쿠팡이 이 정도로까지 공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소프트뱅크라는 역시 미친 쩐주가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쿠팡과 소프트뱅크는 처음부터 알았던 거다. 결국, 이커머스라는 바닥에서 승리하는 회사는 단 하나라는 것을. 쿠팡은 그 단 한 명의 승자가 되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태워 물류센터를 지었고, 소프트뱅크는 기꺼이 그 돈을 냈다. 완전히 미친놈 앞에서 상식을 가지고, 적당한 수익성을 추구했던 다른 기업들은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었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과 쿠팡의 김범석 의장
출처-<쿠팡>
이마트와 롯데가 이커머스에서 쿠팡에 밀리는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 과정에서 두 기업이 실수를 한 부분도 물론 많다. 그러나 이커머스 시장은 가장 미친놈 단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는 미친 시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쿠팡을 이기지 못한 걸 가지고 이마트와 롯데를 욕할 건 아닌 거 같다. 그냥 쿠팡이 대단한 거였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오프라인 사업자가 이커머스에서 성공한 사례는 없는 것 같다. 월마트마저도 Jet.com를 인수하는 등, 이커머스 사업을 키워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이커머스 사업의 부진과 무관하게 월마트는 여전히 잘나가는 중이다. 반면, 이마트와 롯데는 몰락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이커머스 말고도 뭔가 멍청한 짓을 터뜨린 게 있다는 거다. 이 얘길 이어서 해보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