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가회동 31번지. 폭 5m 남짓한 골목 양옆으로 기와에 처마, 돌담으로 구성된 집이 통일감 있게 늘어서 있다. 위에서 보면 집들은 거의 다 ㄴ자 혹은 ㄷ자 모양이다. 우리가 아는 한옥의 전형. 이런 집이 빼곡한 언덕인 가회동 31번지는 북촌한옥마을에서도 꼭 들러야 할 곳으로 꼽힌다. 관광객에게 상당히 ‘인스타그래머블’한 장소로, 남산까지 막힘없이 조망할 수 있다. 사진 속에서 한옥의 정갈한 담장과 처마의 선은 훌륭한 프레임이 된다. 이곳은 공식적으로 ‘전통 한옥들이 즐비한 동네’(서울관광재단)라고 소개된다. 이 정의엔 의심할 구석이 딱히 없는 것 같다.
북촌 ‘백인제가옥’과 서촌 ‘토속촌’ 삼계탕집처럼 일본·서양의 양식이 섞이거나 상업화한 기와집도 한옥
전통의 보존도 중요하지만 ‘사용’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기를…우리 삶에 맞춰 ‘적응력’을 발휘하며
31번지에서 내려오다 보면 만나는 양지바른 터, 가회동 93번지. 제법 큰 집이 있다. ‘백인제가옥’이라고 불리는 이 집엔 외과의사 백인제(1898~?)가 살았다. 훗날 백병원의 모태가 되는 백인제병원을 설립한 인물이다. 서울시가 2009년 사들여 관광지로 개방했다. 사실 백인제가 이 집에서 지낸 시간은 길지 않다. 1944년부터 납북된 1950년까지다. 이 집을 1913년 실제로 건축한 사람은 한상룡(1880~1947)이다. 그는 일제가 신임했던 사람, 즉 친일파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엔 다다미, 창살, 복도 등에서 일본풍이 나타난다.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22호라는데 어째 좀 찜찜하다. 이 집을 ‘전통 한옥’이라고 부르는 건 다소 망설여진다.
이제 북촌에서 서촌으로, 종로구 체부동 85번지. ‘토속촌’이란 유명 삼계탕집이다. 경복궁 일대 한옥을 구경하러 온 김에 들른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좌석 500여개도 모자라 벽면을 따라 긴 줄이 선다. 여러 번 가도 가게 구조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문간을 넘어 마당 같은 곳으로 들어왔는데, 좁은 길을 지나 또 다른 문간을 넘어가게 한다. ㄴ·ㄷ자 한옥 여러 채를 합친 공간이라 그렇다. 그런데, 이 가게도 한옥인가? 한적한 집이 아니라 어수선한 식당이어서 그런지, 왠지 고고해야 할 것 같은 ‘전통 한옥’의 상엔 좀 안 맞는 듯한 느낌이 든다.
최근 책 <한옥 적응기>를 출간한 정기황이란 건축가가 있다. 그는 좀 다르게 본다. 정기황은 석박사 논문을 모두 한옥의 변천사에 관해 썼다. 석사를 마치자 한옥을 연구하겠다는 사람이 그래도 한옥에 한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는 책무감이 들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종로구 혜화동 한옥에 가족을 이끌고 들어가 10년쯤 살며 낭만과 실상을 모두 겪어봤다. 아이들과 함께 마당에 수영장을 만들고 토마토를 키운 일은 낭만이었고, 실상은 이런 것들이었다. 왜 기와는 금속이나 합성수지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풍화하는 자연재료를 고집해 관리를 어렵게 하는 걸까? 왜 지붕 밑에 단열재가 아니라 흙을 넣어 단열하는 공법을 고집해 벌레가 좋아하는 환경을 만드는 걸까? 이런 고민을 이고 살았던 만큼 그는 ‘생활인’의 관점에서 한옥을 바라본다.
우선 토속촌은 ‘한옥의 공간적 변용을 통해 보존(재생)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투명한 재료나 우거진 나무로 덮어 아늑한 실내가 된 마당과 옛 골목길, 그럼에도 공간의 구성은 그대로 유지하며 주거에서 상업으로 능동적으로 적응한 사례라는 거다. 백인제가옥도 마찬가지다. 일본식과 서양식을 좀 섞어서 만들었으면 어떤가? 사람이 편하게 살자고 짓는 게 집인데. 이 집을 지은 사람이 친일을 했다고는 하지만, 죄를 사람에게 물어야지 집에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다만, 이런 집은 ‘전통 한옥’의 규준이 될 수는 없다. 어째서? 기품이 좀 떨어지거나 그다지 전통적인 것 같지 않으니까. 한옥을 연구한답시고 토속촌 문지방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학자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친일파가 짓고 일본풍을 가미한’ 백인제가옥을 ‘한옥’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한옥에 대한 모독으로 여길 사람도 제법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문화재 자격을 박탈하자거나 아예 부숴버리자는 극단적 주장이 판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간 곳이 조선시대 양반가옥이다. 애초 ‘한옥’은 서양식·일본식 가옥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신조어였다. 20세기 초 외교관·선교사가 밀집하며 낯선 형태의 집이 급속히 확산했던 서울 정동에서 한옥이란 말을 처음 쓰기 시작했다. 한옥이 구체적으로 어떤 집을 가리켰는지는 불분명하다. 기와집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 조선시대까지 민가 중엔 기와집보다 초가집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기 때문이다. 당대 기와집을 일컫는 말은 ‘조선집’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개발업자의 등장과 일제가 자극한 민족주의, 그리고 여전히 남았던 신분 상승의 욕구가 맞물려 조선집이 경성(서울)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정기황에 따르면, 한옥이란 말과 조선집이란 양식이 만난 건 1960~1970년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국립종합박물관 건설(1966), 광화문 복원(1968) 등 콘크리트를 사용해 지금의 한옥 이미지와 비슷한 대형 건축물을 세우는 데 앞장섰다. 청량리 일대엔 조선시대 양반가옥을 충실하게 모방한 형태로 1만가구 넘게 거주할 수 있는 대규모 한옥지구를 계획했다. 당시는 북한을 무척 의식할 때였다. 북한은 남한보다 먼저 평양대극장(1960), 인민문화궁전(1964) 같은 한옥 형상의 건축물을 열심히 지었다. 체제 경쟁 속에 ‘전통 한옥’은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데올로기는 가회동 31번지에도 투영돼 있다. 정부는 1976년 북촌을 ‘민속경관지구’로 지정했고, 2000년대 들어 북촌가꾸기사업을 시행했다. 조선시대 어느 시점의 풍경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현재 가회동 31번지의 경관은 ‘전통 한옥’이란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셈이다.
이데올로기의 폐해는 실생활과 유리된다는 점이다. 정기황은 북촌가꾸기사업 이전의 가회동 31번지에 “아이 키우는 집이 진짜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막 살림을 차린 신혼부부, 형편이 넉넉지 않은 노인이 세입자로 많이 살았다는 거다. 북촌가꾸기사업 이후 이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재현에 집착할수록 한옥에 사는 데 치러야 할 비용은 커질 수밖에 없다. 집들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부유층의 별장, 호텔, 촬영 스튜디오로 바뀌었다. 가회동 31번지의 한옥은 이미 2000년대 후반부터 수십억원을 호가했다. 덩달아 ‘한옥’ 자체가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의 집으로 여겨지게 됐다.
정기황은 북촌 같은 곳에서 맥이 끊긴 ‘한옥 적응기’를 아쉬워한다. 원래 현대 서울에 남은 한옥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이후 지은 것들로, 조선시대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일제가 구획한 좁은 필지에 욱여넣은 도시한옥은 열악한 집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관습적으로 끼워넣은 마당을 현대적 거실로 실내화하거나 처마 밑 공간을 수납장·욕탕으로 확장하는 식으로 적응력을 발휘했다. 아직 비교적 값이 싼 서민 주거지로 남은 청량리 한옥단지엔 이 같은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북촌가꾸기사업 이전의 북촌 사람들도 아마 그렇게 집을 고치고 살았을 것이다.
나아가, ‘기와=천연재료’ 같은 조선시대 양식을 고수하는 풍토가 없었더라면 재료뿐 아니라 공법·수선법까지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도록, 그러나 제법 멋들어지게 짓도록 한옥이 적응했을 거라는 게 정기황의 생각이다. 일찍이 정세권·박길룡 같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개발업자·건축가는 남녀평등과 가사노동 효율을 고려해 도시한옥의 개량을 연구했었다. 우리가 해방 후 ‘한옥’을 조선시대 어딘가로 되돌리지 않았더라면 그 맥은 지금도 뛰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정기황의 제안은 일단 한옥을 그 이름에서 해방시키자는 거다. “책엔 쓰지 않았는데, 그것을 그냥 ‘집’이라고 불렀으면 좋겠다. ‘답정너’처럼 규정해버리니까 얘가 발전도 못하고 진화도 못한다.” <한옥 적응기>의 마지막 장은 ‘건축(한옥)은 사용을 위해 존재한다’이다. 지금 한옥은 무엇을,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