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산행] 판지항부터 우가포까지 엄마와 걷는 강동사랑길

2025-07-24

COVID19가 만연했던 팬데믹 시절, 몇천 원에도 망설이는 알뜰한 부친이 캠핑카를 뽑았다. 42년간의 회사 생활을 졸업하며 퇴직금으로 캠핑카를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모친에게 부탁했다. 삼남매는 아득바득 말렸고, 모친은 “당신이 번 돈인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라고 했다. 캠핑카를 살 돈으로 고생하지 말고 호텔을 가라고. 만류하는 말들을 모두 귓등으로 들었다.

모두가 사람끼리 거리두기 하던 시절, 부친은 캠핑카를 타고 자연과 거리를 가까이했다. 그 덕에 가족들도 때때로 바다로 숲으로 캠핑카에 편승해 자연 속 자유를 누렸다. 좁은 단칸방 같은 캠핑카에서 보내는 시간은 서로를 가깝게 했다. 저녁이면 둘러앉아 맥주나 차를 마셨다. 동생이 “아빠가 캠핑카 안 샀으면 어쩔 뻔 했어?”하니 아빠를 제외한 온 가족이 머쓱하게 웃었고, 아빠의 웃음만이 환했다.

가족 단톡방에 정자 바다로 떠난 캠핑카의 사진이 올라온다. 산촌 마을에 사는 필자는 때때로 바다가 고프다. 단촐한 짐을 싸서 본가에 들러 엄마를 픽업해 아빠의 캠핑카로 향했다. 언제든 훌쩍 떠나는 부친 덕에 우리 가족의 삶에 낭만이 추가됐다. 판지항 바다를 정원 삼아 오늘의 우리 집이 자리 잡았다.

아빠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로 아침을 먹는다. 부친의 은퇴를 축하하는 식사 자리에서 “애 셋 키우고, 시어머니 봉양한 나도 진짜 고생 많았어”라며 엄마도 함께 은퇴를 선언했다. 그때부터 빨래와 음식은 식구들 모두의 몫이 됐다. 아빠는 그때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간단한 카레부터 밀키트 동태탕까지 아주 단순한 음식에도 엄마는 칭찬을 했다. “이거 밀키트잖아?!”라고 말하자 “어디 너희 아빠가 음식을 해봤니, 이렇게 채소를 추가하고 간 맞추는 것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라고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자주 아빠의 음식을 먹으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아빠의 음식은 나날이 진화해갔다.

솥밥과 직접 키운 텃밭 채소, 구수한 된장찌개를 든든하게 아침으로 먹었다. 비인가 요리사이자 바리스타가 드립커피를 내려 얼음과 함께 보온병에 담아준다. 모녀를 손님으로 맞이하느라 지친 아빠는 장구 연습을 하겠다고 했다. 파도 소리를 반주 삼아 신나게 장단을 맞췄고, 걷기를 좋아하는 모녀는 바닷길로 나섰다.

우가포에서 시작해 판지항까지 걸을 요량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고요했던 우가마을은 오토캠핑장과 대형카페들이 들어서 북적이는 곳이 되었다. 곰솔이 우거진 숲 아래 바다가 보이는 그네가 보인다. 아빠가 캠핑카에서 싸준 아이스커피를 짤랑거리며 엄마와 나눠마신다. 나무 그늘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차가운 음료를 먹으니 약간의 추위가 느껴진다. 엄마가 “이 더위에 아빠 덕에 우리가 이런 호사를 누리네.”라고 말한다. 엄마는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 좋은 점을 잘 찾는 사람이었다.

우가마을에서 제전마을, 제전마을에서 복성마을로 걷는다. 제주 올레길보다 여기가 더 좋다며, 감탄을 연발한다. 나리꽃이 보이면 국민학생 시절 등굣길 이야기로 걸음이 멈춘다. 조망이 멋진 빨간 벤치가 나오면 앉아봐야 했다. 강아지풀이 예뻐 쪼그려 앉아 사진을 찍고, 모래톱에선 바다에 손을 담근다. 마흔이 임박한 딸은 바닷물에 대한 호기심보단, 손 씻기 귀찮은 뒷일이 먼저 떠오른다. 몇 걸음 더 내딛기가 귀찮아 바닷물을 먼발치에서 본다. 이렇게 나의 젊음이 무색하게 엄마는 자주 소녀가 된다.

판지항에 다시 도착하니 아빠가 반겨준다. 걸어온 경치의 아름다움에 대해 장황하게 연설한다. 아빠는 심드렁하지만 예의를 갖고 들어준다. 마을 길을 걸어 ‘가자미연구소’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러 간다. 예약전화를 하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전화를 하니 사장님이 나와 가까이 있는 가정집 같은 곳으로 안내해주신다.

자귀나무꽃 너머로 바다가 바라보이는 식당에 앉으니 냄비째 국자와 함께 나온 가자미 미역국과 가자미구이, 소라 숙회를 내어주신다. 손님은 우리뿐이다. 찹쌀로 꽈리고추를 쪘더니 찐득거린다며 그래도 드셔보시라고 주시는 반찬이 정겹다. 식사를 반쯤 했을 때 가자미회를 서비스로 주신다.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지만 밥상에 정성이 깃들어 귀하게 느껴진다. 든든한 배를 두드리며 다시 마을 길을 걸어 나온다. 우리의 행색이 여간 우습다. 모녀는 빨갛게 익었다. 새까맣게 탄 아빠의 뒷목에서 자유와 행복이 느껴진다. 오늘의 건강과 평안에 감사하다.

노진경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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