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감각을 넘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로 활동 이어가
“광장 목소리 정치화 실패”…할 일 많기에 연대는 끝나지 않아

[주간경향]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군인에게 항의하는 사람, 롱패딩과 목도리로 중무장한 뒤 응원봉을 손에 쥐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 무지개와 민주동덕 깃발을 든 사람, ‘퇴진 피켓’을 붙인 트랙터,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 비건 감자튀김을 파는 트럭, 눈물을 닦고 서로 껴안는 사람들….
지난 11월 26일 낮에 찾은 서울 종로구 노들장애인야학 건물 4층의 들다방 입구에는 커다란 그림 두 개가 걸려 있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지난해 12월 3일 밤부터 헌법재판소가 윤 전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한 지난 4월 4일까지 광장의 모습을 집대성해 표현한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계엄 이후의 광장에 얼마나 다양한 시민이 모였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동아시아 에코토피아 구성원들이 직접 제작하고 계엄 1년을 즈음해 전시한 것이다. 이들은 전시를 알리며 “우리의 연대를 기억하고 앞으로 걸어 나갈 길을 같이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지난 11월 23일 화상 인터뷰를 통해 모임 구성원 중 이름(활동명·41), 모자(활동명·44), 서원(43)에게 계엄 이후 1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앞으로 이어져야 할 광장의 연대란 어떤 것인지 들어봤다.
광장의 모습을 판화 그림으로 남기기로 한 때는 헌재의 탄핵 사건 선고 당일이었다. 판화는 1980년대 권위주의·독재정권에 대항한 민주화운동 흐름과 함께 민중미술의 한 방법으로 많이 활용됐다. 먼저 광장에 있던 수많은 장면 중 그림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압축해 담는 작업이 필요했다. 광장 속 각자가 서 있던 위치에서 어떤 것을 인상 깊게 봤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의견을 모았다. 그중 그림에 넣을 장면을 정하고 밑그림을 그렸다. 밑그림에 맞춰 나무로 판화 틀을 만든 뒤 그 틀에 잉크를 묻혀 천에 그림을 찍었다. 제작에 한 달 정도가 걸렸다.
20여장을 찍어 광장에서 함께했던 단체들에 전달했다. 이번에 전시한 두 개의 그림은 판화로 찍은 것과 밑그림을 채색한 것이다. 모자는 “계엄 1년 즈음에 어딘가에 그림을 걸어 다시 광장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 들다방에서 제안을 해 전시를 하게 됐다”고 했다. 이름은 “광장에 모였던 수많은 요구사항, 광장에서 나눴던 대화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전시하게 됐다”며 “뭔가를 기념하는 행위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돼야 하지만, 광장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일종의 ‘우리 스스로 말하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계엄 이후 광장에 모인 사람은 그 수도 많았지만 관심사와 특성이 다양했다는 게 특징이었다. 시민들은 계엄 반대와 탄핵 촉구를 함께 외치면서 공동체 감각을 느낀 것에서 나아가 성별과 세대의 경계를 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로 활동을 이어갔다. 2030 여성을 중심으로 한 ‘말벌 동지’들은 하청노동자와 해고노동자, 장애인 등이 투쟁하는 현장에 순식간에 뛰어갔다. 서로의 문제를 공감하고 이해하며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 모습이었다. 그림에도 이런 장면들이 담겼다. 하청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거통고지회) 노동자들, 경영 악화를 이유로 정리해고된 세종호텔 노동자들, 외국자본의 한국공장 철수와 함께 해고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과 이들에 연대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광장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무엇보다 나에게 변화를 주는 경험이었다. 모자는 “모르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 평소에 그냥 무시하거나 지나칠 수 있었던 이야기들도 계엄을 막는다는 같은 목적으로 나온 광장에서 하니까 서로 들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사회문제에 대한) 개인의 불안함으로 끝나지 않고 함께 싸우고 있다는 공동체감을 느꼈다”고 했다. 서원은 “서로 다른 개인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한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며 “광장에서 인상적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애초에 내 생각인지, 옮아온 것인지 헷갈린다고 말할 정도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영감을 얻고, 다양한 주체가 모여 함께 영향을 주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이전 집회보다 입체적이었다”고 했다.
이름은 “계엄이나 탄핵이 아니라 만약 다른 의제라면 나와 반대되는 입장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점이 이전의 집회와 달랐다”며 “그런 다름을 서로 감내하면서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하는 지점이 있다는 절실함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특히 이름은 “서로가 연결돼 있다는 것을 직접 체감한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개발사업, 팔레스타인,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멀리 있는 문제, 남의 문제, 급하지 않은 문제로 여겨지곤 한다”며 “하지만 광장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직접 지키고 있다는 것, 내 생존과 존엄이 다른 사람의 생존, 존엄과 연결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느낀 것”이라고 했다. “(이 경험이) 흐려지기 전에 좀더 선명하게 이어나가는 게 필요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하지만 계엄으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졌을까. 계엄의 진상규명과 책임추궁 절차는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아직 계엄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다. 모자는 계엄 이후 빠진 ‘뉴스 중독’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뉴스를 보고 쪽잠을 자다가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일어나 뉴스를 보는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자는 “여전히 뉴스를 많이 보고 있다. ‘이게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구나’ 싶고, 일부는 해결됐지만 일부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했다. 서원은 “큰 틀에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고, 여전히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을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마음을 놓기가 힘들다”고 했다. 이름도 “정부의 정상화가 큰 소란 없이 이행된 게 다행이기는 하지만 사법적·행정적으로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지, 그것이 충분한 속도로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과 아쉬움이 있다”며 “한국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한순간의 위기를 넘기는 것뿐만 아니라 책임을 묻는 절차가 굉장히 중요했다. 그래서 지금이 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내란 종식’이라는 구호 앞에서 다른 의제들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1년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고공농성을 하고 있고 혐오와 차별, 불평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연대의 힘은 줄어들었다. 이름은 “대선 직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노동자 김충현씨 산재 사고, 한 달 전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집중단속에서 이주노동자가 사망한 문제같이 누가 살고 죽는 문제들이 있는데 왜 시급하게 다뤄지지 않는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서원은 “대선을 치렀지만 이후에 광장의 목소리가 정치화되는 데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원은 “보통 위기 상황에서는 시급히 상황을 정상화할 수 있는 유력한 힘에 몰아주다 보니 상대적으로 진보 의제를 갖는 후보들에 덜 주목하게 된 것 같다”며 “광장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실제로 들었지만 결국은 정치화되지 못했고, 내란을 종식하고 국익을 우선하는 흐름 속에서 작은 목소리들이 묻혀가게 됐다”고 했다. 그는 “야간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산재로 사망한다든지, 여러 가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다 그런(광장에 나왔지만 묻힌) 목소리”라며 “자본의 이익보다는 다양한 존재가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회,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존재를 착취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로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모자는 “광장의 이야기가 사회 전반적인 문화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고 했다. 모자는 “광장에서 ‘너의 이야기를 우리가 같이 나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는 게 굉장히 좋았는데, 국가가 정상화돼야 한다는 이유나 국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다시 (광장의 연대가) 흐려지는 상황이라는 느낌을 받는다”며 “우리가 광장에서 같이 싸웠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기억을 다시 강화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그는 또 “국가에 이득이라는 이유로 개발을 통해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바뀌면 좋겠다”며 “자본의 이익만이 아니라 생태계와의 조화,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서로 이익만이 아닌 공존할 수 있는 가치관을 고려하는 문화가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그림 군데군데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피켓’을 든 시민들의 모습도 있다. 앞으로 함께 해 나가야 할 것들을 되짚어보고 구호를 채워 넣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름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림을 다시 살펴봤을 때 광장에 모였던 많은 의제와 투쟁 중 잘 해결돼 정리된 것이 사실상 거의 없었다”며 “지나간 일들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같이해 나가야 할 숙제의 목록을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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