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는 왜 제국대 교수를 그만뒀나

1900년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영문학 교수였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는 문부성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유학 길에 올랐다. 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나쓰메는 라프카디오 헌의 후임으로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전임강사가 되었다. 런던에서 빼곡하게 작성해온 강의 노트로 강의를 시작했지만, 정작 그가 열의를 보인 것은 소설 창작이었다. 부임한 지 1년 반 후인 1905년부터 나쓰메는 월간문예지에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제국대학 교수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초유의 일이었음에도 그는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즐기듯 창작을 이어나갔다. 연재소설에 병행해서 그 해에만 단편소설을 5편이나 발표했다. 엄청난 생산력이었다.
국비 런던 유학, 2년간 내핍 생활
차별 수모, 영문학에 비판적 시각
“자기 본위 구현” 장편 매년 한 권꼴
“문학이 러일전쟁 승리 토대” 자부
사후 ‘세계적 문호’ 본격 우상화
“적출 뇌 잔주름 많아 비범” 주장도

당시 유력신문사들 사이에서 구독자 확보 경쟁이 치열했다. 결국 아사히신문이 나쓰메를 연재소설 전담 문예부 기자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명목상은 기자였지만 제국대학 교수 이상의 고정급을 받는 전업작가였다. 나쓰메는 사직서를 내고 4년간의 교수생활을 접었다. 그리고 1년에 1편 정도의 장편을 완성했고, 사망 시까지 10편 이상의 장편소설에 중단편과 평론을 합쳐 2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 여기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나쓰메는 도쿄제국대 영문과 출신의 엘리트였다. 18~19세기 영문학에 대한 조예는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고, 대학의 정교수 자리도 거의 보장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20세기 초 일본에서 소설가가 사회적 인정을 받는 존재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쓰메를 소설 창작의 길로 이끌었을까.
아내에게 “이 다 뽑으라” 편지

계기는 영국유학이었다. 요코하마에서 독일선적 프로이센호에 승선한 나쓰메에게 선상은 곧 서양이었다. 배에서 만나는 서양인들은 경제 수준에서부터 문화적 취향, 매너, 용모에 이르기까지 흠잡을 데 없는 ‘우월한 다수’였다. 처음으로 마주한 서양이라는 거울 앞에서 그는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순간들과 마주해야 했다. 말레이시아 페낭에 정박했을 때 도쿄의 아내에게 쓴 편지 문면은 눈을 의심해야 할 정도이다. “당신은 이를 다 뽑고 틀니를 맞추도록 하시오. 지금대로는 보기 흉하니까.” 아내의 고르지 못한 치열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던지 “머리도 비녀로 쪽지지 말고 자연스럽게 어깨너머로 흘러내리라”는 지시도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다. 아내 교코는 나쓰메와 맞선을 봤을 때 부끄러운 치열을 가리기 위해 연신 손을 입에 가져갔었다. 이 편지를 썼을 때 그의 뇌리에는 이미 선상에서 마주치는 백인 여성들의 단정한 치열이 드러나는 품격있는 미소와 그녀들의 어깨에서 출렁이는 금발이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백인 여성의 ‘우월’한 용모가 표준에 가까운 비교항으로 자리 잡았을 때 일본 여성의 전통적 머리 모양조차도 고루한 습속으로 비쳤던 것이었다. 나쓰메가 서양을 처음 접했을 때 엄습했던 열패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일례이다.

런던에 도착한 나쓰메는 유니버시티 컬리지의 청강생으로 영문학 수업을 몇 차례 들은 것을 끝으로 아예 하숙방에 칩거해서 책을 읽었다. 당시 유럽에 온 일본인 국비유학생은 청강생이 대부분이었고, 정부도 학위를 요구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주는 유학자금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쓰메는 먹는 것을 줄여서 책을 샀다. 책을 덮고 가끔 거리에 나가 메케한 매연과 안개가 뒤섞인 도시를 방황했다.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고단한 몸을 옮기고 있었고, 도시는 비인간적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가난한 유학생으로 런던에서 네 번이나 옮겨야 했던 거처는 날로 증식해가는 슬럼가와 인접해있었다. 그리고 너무 왜소해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이 동양인이 인종차별의 그물코에서 벗어나는 행운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읽는 소설에는 밑줄과 메모가 많아졌다. ‘못 읽어주겠다’ ‘칙칙한 표현’ ‘이 작가는 바보’ 같은 글귀는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영문학을 가르쳤던 나쓰메가 영국에 와서부터 영문학의 경전들의 행간에 밑줄 치면서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불온한 독자로 변모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나쓰메의 일기에는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더불어 일본이 처한 현실을 비관적으로 진단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했다.
열패감에서 자라난 서양 대항의식

메이지유신 전후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지면 배운다’는 현실주의 노선은 짧은 시간에 서양문명을 흡수함으로써 국가의 독립을 지켜낸 것은 물론이고 신흥 열강의 지위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나쓰메의 시각으로는 ‘배워도 진다’였다. 서양을 배워서 ‘국가의 독립’은 성취했을지언정, 서양을 표본으로 삼고 추종하는 한 ‘정신의 독립’은 무망하며, 결국 서양의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쓰메가 작가로 입문할 무렵 노트에 적은 기록에는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노예이다’라는 글귀가 나온다. 이는 자기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자각이고, 후일 그가 강연이나 평론에서 강조했던 ‘자기 본위’의 주장으로 이어졌다. 이 대목에서 그가 영문학 교수를 그만두고 작가가 된 배경이 어렴풋이 가시화된다. 런던에서부터 서양에 대한 대항의식을 키워온 나쓰메에게 영문학이든 불문학이든 서양문학을 일본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남의 것을 떼다가 파는 중개상의 역할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반면에 소설가는 좌우고면하지 않고 자기 본위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였을 것이다.
나쓰메는 죽어서 더 유명해진 작가이다. 위궤양을 앓고 있던 그가 자택에서 숨을 거두자, 그의 제자들이 나서서 석고로 데스마스크를 뜨고 대학병원 해부대에 올려 뇌를 적출했다. 뇌는 포르말린 유리 용기에 담겨 도쿄대 의과대 표본실로 옮겨졌다. 세 차례나 수상을 역임한 가쓰라 타로(桂三郞) 등 근대일본의 저명인사 30여 명의 뇌가 보관돼 있는 곳이었다. 다음 날 유력 신문들은 ‘해부대 위의 문호’ ‘문호의 뇌’와 같은 제목의 기사를 송출했다. 소제목으로는 ‘일본인에게 처음 보는 우수한 뇌’ ‘실로 귀중한 천재적인 뇌수의 형태이고 영원한 보물이 될 것’과 같은 다소 선정적인 문구들이 지면을 채웠다. 작가가 책상 위에서 벌인 격투의 산물인 문학의 언어들을 국가와 공동체가 회수해가는 절차치고는 지극히 속물적이었다.

19세기 중엽까지 유럽에서 유행했던 골상학은 뇌의 크기에 따라 인종을 서열화했다. 백인의 뇌가 가장 크고 흑인의 뇌는 가장 작다는 식이다. 해부에 임했던 의대교수들은 기자들에게 말했다. “비교해 보면 가쓰라 수상의 뇌가 더 컸지만 잔주름은 나쓰메 작가가 더 많았다.” 나쓰메의 뇌 중량은 일반인의 평균수준이었다. ‘잔주름’에 대한 언급은 중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데 대한 실망감을 감추기 위해 덧붙여진 것이었다. 여기서 유럽에서도 19세기 후반 들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이비 과학 취급을 받던 골상학까지 동원해서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청일전쟁 이후부터 일본의 유력한 문학자들은 ‘문호대망론’을 입에 올렸다. 우치무라 간조는 청일전쟁 직후 ‘왜 대문학은 나오지 않는가’라는 논설을 발표했고, 러일전쟁 후 평론가 우치다 로안은 ‘전후의 문학’이라는 평론에서 일본이 일등국의 반열에 들어선 만큼 문예도 일등국다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러일전쟁 직후 나쓰메가 발표한 몇몇 논설은 이들의 주장과는 다소 결을 달리하면서도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문학이 서양문학과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포부를 담았다. 이러한 언설들은 무력의 뛰어남 만이 아니라 문학과 같은 예술 분야를 통해 ‘지력(智力)’의 우수함도 증명해야만 진정한 일등국이 된다는 취지로 수렴된다. 문학은 아무렇지도 않게 정치를 넘나들고 있었다.
“교양 가정은 나쓰메 전집 갖춰야” 선전
나쓰메의 사후 불과 2년 만에 나쓰메 전집을 펴낸 이와나미 출판사가 게재한 신문광고도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위화감을 자아낼 만큼 위압적이다. ‘교양있는 가정이라면 반드시 나쓰메 전집을 갖추자’ ‘일본이 낳은 세계적 문호를 영구히 기념해야 할 전집’. 적어도 나쓰메의 생전에 그의 문학이 ‘문호’ 또는 ‘세계적 작가’라는 칭호에 합당한지에 대한 합의는커녕 논의조차도 이루어진 바 없었다. 근대문학이 성립하기 위한 대전제는 독립한 개인이 창작한 것을 독립한 개인으로서의 독자가 향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등국 환상’에 기대어 나쓰메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언설들은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앞세우는 무모함도 거리끼지 않았다. 영국 제국주의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토머스 칼라일은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즉, 문학이 국가의 위신과 명예를 위한 제단에 바치는 공물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근대화에 매진하던 일본이 스스로의 정신문명의 총아로 낙점한 것은 나쓰메 소세키였다. 본디부터 동아시아의 근대문학이 세속적인 것이었는지, 문학을 향유하는 방식이 통속적인 것인지는 두고두고 따져볼 논제이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