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박정희] (14) 교사 박정희, 가난한 아이 월사금 대신 내주는 ‘호랑이 선생님’

2024-12-19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사회 첫 발

근무 끝난 후 학생들과 씨름·축구 시합

일본인 교장 몰래 조선 역사 등 가르쳐

새벽마다 나팔 불어 마을사람 생활 바꿔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가 청년 시절,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저 그가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5.16을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불만스러웠던 학창 생활이 끝난 것이다. 같은 해 4월 1일 그는 문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선생님이 되어 사회의 첫출발을 하게 되었으니 구미 일대에서는 “개천에서 용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의 나이 막 스무 살이었다. 월급은 45원, 그때로선 적지 않은 돈이었다. “아이고 이제 한 시름 덜었구나!” 누구보다도 기뻐하는 어머니 백남의의 일성이었다. 막내아들의 월급으로 찌든 가난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막내가 선생님이 되었다는 뿌듯함이 더 컸다.

경상북도 문경은 새재로 유명한 곳이다. 나는 새도 쉬어갈 만큼 높고 험하기로 이름난 고개다. 그는 4학년 담임 선생님을 맡았다. 처음 교단에 서는 교사가 가르치기 수월한 학년이 4학년이었기 때문이다.

교실에 들어선 박정희 교사는 칠판에 커다랗게 자기 이름을 한글로 썼다. “우째 남자가 여자 이름이다 그치?” 누군가가 속삭이는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 희(熙, 빛날 희)자라는 돌림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 순희, 숙희랑 비슷한 여자 이름 같지만, 한문으로 쓰면 계집 희(姬)자와는 다르다.” 박정희교사는 한글 이름 옆에 다시 한문 이름을 썼다.

“너희들이 보다시피 앞으로 1년 동안 너희들을 담임할 이 선생님은 말이다. 키는 좀 작지만 야무지고 당당한 조선 청년이다. 혹시 바지 입은 여자로 알고 업신여기면 큰 코 다칠 끼다.”

박 교사의 말에 반 아이들은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인사가 끝나자 그는 아이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옷차림이 남루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아침도 배불리 먹지 못한 아이들의 기운 빠진 모습에 박 교사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와 다를 바 없는 배고픈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의 처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농촌에서는 가장 고달픈 계절이 봄이었다.

아이들은 배를 곯아 기운만 빠진 것이 아니었다. 겨우내 제대로 손발을 씻지 못해 때가 끼어 시꺼먼 손발이 갈라져 피가 나는 아이들도 많았다. 머리에는 새까맣게 쇠똥이 앉아 있고, 부스럼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박 교사는 아이들의 용의 검사를 할 때마다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따뜻한 쇠죽을 꺼내 손발을 푹 담갔다가 때가 불거든 싹싹 밀어라. 손발이 이게 뭐냐, 두꺼비처럼 말이다!”, “임마야, 니 머리에 앉은 쇠똥은 언제 벗겨낼끼고? 이러니 부스럼이 덕지덕지 솟는 거 아이가.” 부스럼 약을 구해 발라 주며 머리를 자주 씻으라고 주의를 주기도 하였다.

박 교사는 월급 45원을 받으면 하숙비로 8원, 가난한 집 아이들의 월사금으로 2~3원(1인당1원씩 2~3명)을 지출했다. 그리고 본인의 용돈으로 약 10원을 쓰고 나머지는 모두 고향 상모리의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그 돈은 가난한 집안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다. 제사 때는 아껴 쓰고 남은 용돈을 따로 보내기도 했다.

박 교사는 복장이 늘 단정했고, 출근은 빨랐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했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하고, 일기와 편지 쓰기를 장려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많이 썼다. 유리창, 천장의 거미줄, 화장실 청소까지 철저히 시켰다. 그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그는 월사금을 내지 못해 쫓겨나야 할 위기에 처한 아이들의 월사금을 대신 내주는 경우가 많았다. 소풍 때는 점심을 싸 오지 못한 학생들에게 도시락을 나누어 주고, 발목을 삐어 걸음이 어려운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오기도 했다. 박정희는 진정한 사랑으로 학생을 가르쳤다. 한 제자는 그를 “방정환 선생님 같은 분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3년간 이어진 박정희의 문경 시절은 보람차고 활기찼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거주하던 마을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사랑했다.

때로는 12km나 떨어진 벽촌까지 자전거를 타고 제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감격 시키기도 했다. 당시의 농촌에서 교사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자칫 위압적이고도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 있었으나, 박 교사는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잘 이해하며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약간의 지위를 시골의 농부들에게 과시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박 교사의 문경 시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를 넘어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고자 했던 지도자였다. 예를 들어, 새벽마다 언덕에 올라 나팔을 불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떠올리면 나팔소리가 연상될 정도였다. 이것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만들어진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우리 모두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 라는 노래와도 연결된다.

그의 일과는 근무 시간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었고, 교육은 교과과정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달리기, 철봉, 뜀틀, 멀리뛰기, 맨손체조 등으로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씨름, 기마전, 축구 등 시합도 주관했다. 주말에는 학생들을 불러 뒷산에 올라가 전쟁놀이를 했으며, 마을 청년들을 모아 악단을 조직해 공연도 다녔다. 그는 단순히 기능적 교사가 아니라 마을의 작은 지도자였다.

20세의 젊은 나이로 교편을 잡았던 무렵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에 이르렀던 시기였으며, 한민족 말살 정책은 교육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역사는 가르칠 수 조차 없었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러나 민족정신이 남달리 강한 박 교사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민족주의를 강조해서 가르쳤다. 박정희는 일본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제자들에게 “우리는 한민족(조선사람)이다. 우리글,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단군 후손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문화민족임을 깨우치게 했으며, 충무공 이순신의 호국정신을 일깨웠다. 또한, 일장기에 태극선을 그리며 민족혼을 강조하는 등 일관되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예를 들어, 그는 학생들에게 “우리끼리 있을 때는 우리말을 쓰자”고 강조 했으며, 조선어를 가르치며 “이 글을 잘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때로는 학생 한 명을 복도에 세워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는지 망을 보게 하고, 교실 안에서는 태극기, 조선의 역사와 시조를 가르쳤다. 그는 종종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학생 여러분! 전 세계를 얻는다 해도 민족이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20세기의 후반기가 되는데, 우리는 남을 이길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이 같은 가르침은 학생들에게 큰 동기를 부여했고, 박 교사는 엄격하면서도 다정다감하고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어느 일요일, 학생 몇 명이 박 교사의 하숙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사진액자를 보며,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박 교사는 ‘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며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박 교사는 자주 나폴레옹과 이순신 같은 위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도 재미있게 설명하며 “비록 가난하고 어려워도 꿈을 크게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봄 소풍 날이 되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도 깨끗한 옷을 입고 도시락을 싸 와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박 교사는 어깨에 나팔을 메고, 행진을 이끌었다.

“선생님, 신나게 나팔 좀 불어 주이소. 그래야 발을 맞춰 가지예.” 여자아이들이 졸랐고, 남자 아이들도 나팔 소리가 듣고 싶다고 졸랐다.

박 교사는 “그래, 좋다. 나팔 소리에 발을 맞춰라”하며 나팔로 행진곡을 불기 시작했다. 사범학교에서 악대 출신답게 능숙한 솜씨로 나팔을 불었고, 학생들은 즐겁게 발을 맞추며 걸었다.

소풍 장소에 도착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했다.

“선생님! 물에 빠졌습니더! 큰일 났습니다!”

박 교사는 총알처럼 그쪽으로 달려가 물속으로 가라앉으려는 아이를 구해냈다.

그는 물가에 아이를 엎어 놓고 인공호흡을 해 아이가 물을 토해내게 했다. 아이는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담임 선생이 정신을 차린 아이의 머리에 알밤을 먹이며 “조심해야지 이놈아! 박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잖아”하며 소리쳤고, “박 선생님, 옷이 흠뻑 젖었으니 어떡하지요?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박 교사는 젖은 옷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금방 마를 테니 괜찮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라고 말했다.

박 교사는 제자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헌신적으로 가르쳤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항상 민족적 울분을 가슴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며, 제자들이 언젠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시기의 관련자 증언에는 박정희가 일본 사람, 일본인 동료 교사, 일본인 교장 등에게 적대감을 표현하거나 다투는 경우에 관한 것이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박 교사는 몸집이 작은 데다가 학창시절에 입던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교무실에서는 출입문에서 제일 가까운 말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손님들은 가끔 사환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을 때였다. 학교 공사를 하는 일본인 청부업자가 담배를 문 채 거만하게 교무실로 들어섰다. “어이, 내 말이 안 들리는가? 교장 계시냐고?” 그러자 박정희는 그 사람을 향해 의자를 돌려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봐, 당신네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라는게 진실이라면 당신이 어떻게 그런 언동을 할 수 있나? 일등 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먼저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데 교사인 내게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당신 같은 상식 없는 인간과 상대하겠는가. 어서 나가 봐!”

“저, 저런...... 감히 누구에게.......” 청부업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담배를 뽑아들고 소리쳤다. “더 이상 창피당하지 않으려면 썩 나가는 게 좋을 텐데 그래.” 그 때 교장실에서 교장이 달려 나와 말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싸움이 벌어질 뻔했다.

박 교사는 수석 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지는 등 민족적 자존감을 지켰다. 하숙집 주인도 박 교사가 술만 마시면 ‘일본놈들’ ‘왜놈들’ 하고 욕을 해댔다고 증언한다.

당시 교사들은 군대식으로 머리를 빡빡 깎게 되어 있었지만, 박 교사는 장발이었다. 그 시절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전이자 반발이었다. 어느날 도(道)에서 데라도(寺戶) 시학(장학사)이 문경공립보통학교를 시찰하러 왔다. 그는 강평자리에서, “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 이것은 황민화(皇民化)의 정책에 순응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라며 박 교사를 겨냥하여 비판했다.

그날 밤 아리마(有馬)교장의 사택에서 열린 시학을 위한 술자리에서 다시 박 교사의 두발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에 박 교사는 시학과 교장에 맞서 언쟁을 벌였고, 결국 술잔을 던졌다. 다음날, 아리마 교장은 박 교사를 교장실로 불러 질책하며 데라도 시학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박 교사는 모욕감을 참을 수 없었다. ‘조선인’주제에 너무 건방지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 교사는 아리마 교장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평소에 쌓이고 쌓인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한 순간이었다. 그는 결국 사표를 써서 던지며 교직을 떠났다.

박 교사는 교원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이처럼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를 친일세력이라 비판하는 일부 ‘진보·좌파’ 세력이 있더라도 그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며 민족주의자로서 언행을 했다는 증거와 증언은 일관성있고 부인하기 어렵다.

박 교사는 가난 속에 어렵게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배고픔도 면하고 대접도 받을 수 있는 당시로선 안정적인 교사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교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물과 공포에 쌓여 있는 제자들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으로는 그놈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총칼을 차고 와서 이겨주마.”

박정희가 군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일본인 교장과의 갈등과 사표 제출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소년기에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으면서 군인의 꿈을 키워왔다.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전기는 박정희에게 이상적 군인과 지도자의 롤모델을 제시했을 것이다. 이순신으로부터는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나폴레옹으로부터는 결단력과 실용주의를 배운 그는 이 두 가지 영향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가치관을 형성하며, 그가 군인과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동기 부여의 원천이 되었으리라.

박 교사는 자주 학생들에게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물었다. 그러면 학생들은 “선생님은 이 다음에 뭐가 되고 싶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박 교사는 미소 지으며, “나? 나중에 봐라. 나는 대장이 될 거다. 전장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워 이기는 대장이 될 거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는 “경찰보다 군인이 힘이 더 세다.”는 사고방식을 소년 시절부터 품고 있었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그는 점점 군인의 꿈을 구체화했을 것이다. 그는 “선생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일본에 맞서기 위해 더 강력한 도구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강력한 힘을 가진 군인을 통해 억압적인 현실을 타개하려는 열망을 품었다. 그의 열망은 단순히 개인의 성공에 그치지 않았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민족을 일깨우려는 그의 이상과 결합되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렇게 다짐하며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그는 약 3년간의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마감하고, 스스로 군인의 길을 찾아 만주(滿洲)로 향했다. 이는 조선 독립과 민족적 자존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3년간 교사생활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다진 시간이었다. 그는 학생들과의 소통을 통해 민족적 자존감과 책임감을 심어주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을 체득했다.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며 실용주의적 민족주의를 실천한 경험은 그가 교직을 떠나 군인의 길을 선택하며 자립적 국가 건설과 민족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비전으로 이어졌다.

이는 훗날 자주국방과 경제 성장을 통해 조국 근대화를 추구하는 국가 운영 방식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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