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탄압에 맞선 ‘독립의 횃불’… 3·1운동으로 자주국가 천명 [심층기획-대한민국, 위기에서 길을 찾다]

2025-01-01

<1부> 한민족 국난 극복사

1회 - 자주독립운동의 역사

식민통치 시작되자 본격 독립운동

비밀결사 조직해 무장투쟁 벌이고

사립학교 중심으로 애국청년 육성

임시정부 세우고 일제에 선전포고

연합군 일원으로 태평양전쟁 참전

미군과 국내 진공 작전 도모하기도

“아아, 원통한지고! 아아, 분한지고! 우리 이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 사천 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1905년 11월20일,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칼럼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실었다. 한민족은 일제가 러일전쟁 승리를 앞세워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하자 강하게 반발하면서 저항했다. 한민족은 1905년 을사의병에 이어 1907년 정미의병을 일으켰지만 압도적 무력을 가진 일제에 의해 학살됐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 상징적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

◆독립운동의 분수령, 3·1운동

1910년, 무력을 앞세운 일제의 병합조약을 거쳐 식민통치를 받게 된 한민족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헌병경찰 제도를 통해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국내에서는 안악사건이나 105인사건 등 일제의 거듭된 탄압에도 다양한 형태의 비밀결사를 조직해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 세력과 함께 독립운동을 도모했고,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통해 애국 청년들을 육성하려 했다.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는 한인촌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 대표적인 독립군기지로는 삼원포와 북간도 용정촌, 봉밀산 한흥동 등이 꼽힌다. 이들 독립군은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공격하거나 국내 진공을 시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벌어졌던 크고 작은 독립운동의 흐름은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으로 모아졌다.

경성 한복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곧 전국 곳곳으로, 해외로 퍼져갔고 한 달 만에 수백만 명이 참가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으로 확산했다. 참가자들은 한국과 한민족은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정정당당하게 선언하고 일제는 한반도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지극히 평화적인 시위였음에도 일제는 군대와 경찰 등 무력을 사용해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탄압했다. 특히 수원 근처 제암리에서 주민 30여명을 교회에 가둔 뒤 불태워 죽이는 등 제암리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제암리 사건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큰 파문이 일자 책임자에 대해 가벼운 처벌만 하면서 사건을 은폐, 축소했다. 1년여 3·1운동 기간 살해된 사람은 7500여명, 부상당한 사람은 1만6000여명, 체포된 사람은 4만6000여명에 달했다고,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적었다.

3·1운동은 비록 곧바로 독립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지만,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이후 각종 독립운동의 사상적 대중적 기반이 됐다. 전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 사건으로도 기록된다. 강제병합 100년이 되던 2010년 일본의 총리 간 나오토는 담화에서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을 거론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민족의 뜻에 반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강제성과 불법성을 사과했다.

◆무장투쟁·의혈투쟁으로 이어져

일제는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기만적인 식민통치를 이어갔지만, 한민족은 독립운동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국내에선 실력양성론에 입각해 민립대학 설립운동, 국산품 애용운동, 문맹퇴치운동, 농촌계몽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으로 전개됐다. 무장투쟁도 본격화했으며 일제의 주요 기관이나 인사를 타깃으로 한 의혈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기타 독립군 연합 부대들은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군에게 최초로 승전보를 올렸다.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일소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병했다. 이에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천주교 계열의 의민단과 기타 독립군 부대들은 연합해 청산리 일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은 보복으로 한국인 마을을 습격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가옥과 학교를 파괴했다.

청년들은 1920년대 전반에 의열단을 조직해 조선총독부나 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임시정부 산하에 한인애국단을 결성한 김구는 1932년 젊은 청년 이봉창을 일제의 심장부 도쿄로 보내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다. 같은 해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고 훙커우공원에서 전승 축하식을 거행하자 윤봉길을 보내 식장을 폭파해 많은 일본군 간부를 살상했다.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에 이어서 1937년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하는 한편, 한국인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군사와 노무를 대규모로 동원했다. 독립운동의 무게추는 해외로 옮겨졌다.

◆임시정부, 광복군 조직하고 대일 선전포고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임시정부와 김구는 1940년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광복군을 결성했고, 나중에 연합군 일원으로 인도·미얀마전선에 투입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1941년 일제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전 한국 국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여 전투 단위가 되어 추축국에 대하여 선전한다.

―1910년의 합병 조약 및 모든 불평등 조약은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국의 한국에서의 합리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한다는 것을 거듭 선포한다.”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산하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던 김원봉 역시 1941년 중국 팔로군과 연합해 호가장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했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광복군에 합류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미군의 특수부대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위한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 선언으로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은 이뤄지지 못했다. 비록 한민족 주도가 아니었더라도 ‘광복’은 자주독립을 위해 끈질기게 투쟁한 수많은 국민들의 희생에 빚지고 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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