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해…가속 노화

2024-10-06

‘한 평’(약 3.3㎡)이 채 안 되는 고시원 방은 양팔을 쭉 펼 수 없을 정도로 좁다. 스무 개 남짓한 방들이 줄지어 있는 이곳에서 김일환씨(56·가명)는 7년째 지내고 있다.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는 곳이라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수입이 불안정한 그에게 다른 선택지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김씨가 처음 왔을 때 “무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서울 마포구의 이 고시원은 고립된 ‘섬’을 연상케 한다. 햇빛이 들지 않아 한낮에도 어둑한 복도에 들어서면 몇몇 방에서 인기척이 난다. 하지만 공동주방도 없는 이곳에서 거주자들끼리 알은체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정기적으로 일하는 곳이 없는 김씨는 사람을 만날 일 자체가 드물다. 그는 “한쪽 눈이 잘 안 보여서 써주는 곳을 찾기 힘들다”면서 “몸이 더 성할 땐 ‘노가다’ 소개소에도 나갔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단절된 인간관계, 뇌를 비롯 생체시계 빨리 돌려

의료급여 수급권자인 김씨는 고지혈증과 고혈압 때문에 때때로 보건소에 들러 약을 처방받지만 제때 챙겨먹지는 못한다. 밥과 김치, 라면 정도로 때우는 식사도 불규칙하다. 그는 “머리가 하도 아프니까 약은 안 듣고 술이라도 먹어야 좀 나아서… 끊으려고는 하는데 마음대로 조절이 안 되는 게 술”이라고 했다. “말 길게 섞는 것도 버겁다”는 그에게선 사회적 고립과 열악한 경제사정 탓인지 몸속 시곗바늘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가속노화’를 짐작할 만한 모습이 내비쳤다.

가속페달을 밟은 듯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속도보다 더 빨리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는 가속노화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단절된 인간관계를 비롯해 불규칙한 식사와 수면, 제한되고 단조로운 신체·정신적 활동 등은 생체시계를 더 빠르게 돌리는 대표적 원인이다. 이런 생활환경에선 고혈압과 당뇨병, 대사증후군 같은 만성질환으로 신체건강이 악화되는 징후 외에도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뇌의 이른 노화’ 또한 발생하기 쉽다.

특히 뇌의 여러 영역 중 전두엽은 20대 중반에야 완성된다고 할 만큼 완만한 속도로 발달한다. 하지만 이르면 40대를 전후해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할 정도로 본격적인 노화로 접어드는 시점은 뇌의 다른 영역보다 더 빠르다. 무엇보다 만성적인 고립과 관계 단절, 높은 우울·불안감은 전두엽의 기능 저하를 가속시킨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고립이 되면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줄어들고 자신 내부의 감정에 몰입하게 돼 과거의 상처받은 감정이나 슬픔들이 더 크게 느껴지면서 우울감·불안감이 발생하기 쉽다”며 “우울증 환자의 뇌 영상을 보면 전두엽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음주나 흡연을 많이 하는 경우에도 전두엽 기능을 교란시켜 우울감 외에도 분노나 피해의식이 증가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사회적 고립에 취약하고 정신·신체건강 관리에도 소홀해지기 쉬운 1인 가구는 국내에서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 9월 발표한 ‘장래가구추계: 2022~2052년’ 자료를 보면 2022년 739만가구로 전체 가구에서 34.1%를 차지했던 1인 가구는 15년 뒤 2037년에는 971만가구로 늘어 전체의 40.1%에 달할 것으로 예측됐다.

고립된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추세는 가속노화가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수준을 넘어 생이 끝나는 시점까지도 앞당기는 고독사 문제와도 이어진다. 전문가들은 전두엽이 더 빨리 늙고 있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징후로 일상에서 꼭 필요한 활동마저 지속하지 못할 정도로 의욕이 저하되고, 주변에 대한 관심 또한 사라져 우울감이 더욱 극대화되는 악순환을 꼽는다.

특수청소업체 하드웍스의 김완 대표는 건강한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대부분의 주거 현장에서 거주자들이 사회적 고립과 건강 문제를 경험한 흔적을 발견한다고 전했다. 김 대표는 “고독사 현장이든, 쓰레기집이든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의 식탁이나 냉장고, 찬장에서 라면이나 통조림 같은 변변찮은 식사 흔적만 남은 공통점을 보면서 그들이 어려운 경제적 사정 때문에 부실한 영양 상태에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 우울·불안 악화시켜

가속노화를 일으키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은 한두 가지 변화만으로도 연쇄적으로 다른 요인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현재 물류업체에서 일하는 최현종씨(39·가명)는 앞서 몸담았던 일터에선 직종의 특성상 몇달 단위로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는 생활을 해야 했다. 건강한 식단을 챙기기 어려웠고, 잦은 야근과 직장 내 스트레스까지 더해지면서 여가시간은커녕 잠자리에 들고 기상하는 시간도 불규칙했다. 연애나 결혼을 생각할 상대방을 만날 기회조차 없어 박탈감도 컸다. 그 때문에 최씨는 일반적으로 노화를 경험하기엔 이르다고 인식되는 30대부터 자신이 부쩍 빨리 “닳아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최씨는 “그땐 어머니가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모처럼 집에 돌아가도 대화할 상대가 없으니 혼잣말로 신세 한탄을 할 때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나마 쉴 수 있는 짬이 나도 멍한 상태로 TV 채널을 돌리거나 인터넷 영상을 보고 넘기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할 수 있는 지금의 직장으로 옮기고 어머니도 퇴원해 함께 집에서 식사를 챙기게 되면서 사정이 다소 나아졌다. 그는 “전에는 온몸의 바닥난 에너지를 쥐어짜내는 느낌이 들 만큼 몸도 마음도 늙어 있었다”면서 “지금 일하는 곳도 스트레스는 받지만 퇴근길 10~20분 정도라도 산책할 여유가 생기고 집에도 가족이 있으니 전보다는 어느 정도 기력도 의지도 되살아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최씨처럼 가속노화의 위기로 몰아넣는 환경에 놓일수록 지친 뇌는 빠르게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도파민에 의존하기 쉽다. 자극적인 영상을 볼 때나, 단 음식과 정제된 곡물을 섭취할 때 잘 분비되는 도파민은 그 양이 늘어날수록 받아들이는 수용체의 감도를 낮춰 더 많은 도파민을 요구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일으킨다. 이는 또한 스트레스 호르몬이라 불리는 코르티솔 분비 증가와도 이어진다.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가속노화를 만드는 주요 요소 중 하나인 코르티솔은 우울과 불안을 악화시켜 전두엽 기능을 떨어뜨리고 수면의 질까지 나쁘게 만든다”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잠을 많이 못 잔 상태에서 전두엽 기능이 떨어지면 틱톡 등 짧은 동영상을 스크롤하거나, 맛있는 게 먹고 싶고, 충동적인 소비를 원하는 등 일시적 쾌락에 취약해지기 쉽다”고 설명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사회적 고립을 비롯해 개인의 건강을 저해하고 노화를 가속시키는 다양한 요인들을 함께 바꿀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 교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은 2차, 3차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요소가 무너져 있으면 악순환은 끝나지 않는다”며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선 삶의 요소를 다면적으로 관리해야 하는데 아직 고장나지 않은 부분, 즉 기능이 남아 있는 부분에 주목해 내재역량을 관리하면 나이가 많아도 개선할 여지가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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