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미국 빅테크 의존 탈피해 ‘소버린 디지털’ 육성 본격화”

2025-08-04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시장 지배력에 맞서 유럽연합(EU)이 ‘디지털 주권’을 내세우며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MS)·구글 등 미국 기업들이 EU 클라우드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인공지능(AI)·반도체·양자컴퓨팅 등 미래 기술 분야에서도 유럽 기업들이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EU에 ‘소버린 테크(Sovereign Tech)’ 확보가 생존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EU는 공공조달 시 유럽 기업을 우대하는 ‘유럽제품 구매법(Buy European Act)’ 등 산업정책 추진과 3000억 유로(약 477조6660억 원) 이상의 유럽산 클라우드 인프라 확충 등을 논의 중이라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하지만 유럽 내 기술 생태계의 미성숙, 투자 부족, 인재 양성의 한계 등을 들어 이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전문가들은 “보호무역주의만으로는 진정한 기술 주권을 확보할 수 없다”며 건강한 경쟁 체계 구축을 촉구하고 있다.

FT에 따르면, 프랑스의 AI 스타트업 미스트랄(Mistral)은 1년 전만 해도 유럽 기술 산업의 미래를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창업한 지 4주 만에 이 회사는 파리의 스타트업 붐 속에서 1억 유로(약 1592억1300만 원)를 조달했다. 불과 6개월 뒤 이 회사는 3억8500만 달러(약 5356억1200만 원)의 시리즈 A 투자를 유치했다. 창업한 지 10개월도 되지 않아 기업 가치는 20억 달러(약 2조7824억 원)를 넘어섰다.

그러나 미스트랄은 지금 미국 기술기업에 대한 유럽의 의존을 상징하는 존재로 변했다. 지난 6월 MS는 미스트랄에 1600만 유로(약 254억7504만 원)를 투자하고 이 회사의 AI 모델을 자사 클라우드 플랫폼 ‘애저(Azure)’에 탑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계약은 미국이 AI 기술을 장악한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 유럽 관료들과 기술 전문가들은 유럽 기술이 독립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클라우드부터 OS, AI까지…미국산 기술에 의존하는 유럽

FT에 따르면, 유럽의 정치·경제 엘리트들 사이에서 미국 기술 인프라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는 문제가 점점 더 부각되고 있다. 특히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재등장은 이 우려를 부채질하고 있다. 트럼프는 무역, 규제, 방위 이슈를 융합해 정책을 흔드는 독특한 방식으로 유럽의 동맹국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벤자민 레브콜레브스키 오베 클라우드 최고경영자(CEO)는 “디지털 주권 문제는 지난 20년간 꾸준히 논의돼왔지만, 트럼프 당선 이후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FT에 말했다.

그는 “디지털 주권이란 단순히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안보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현재 아마존, MS, 구글은 유럽의 클라우드 컴퓨팅 시장에서 66%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모바일 운영체제(OS)는 애플과 구글이 독점하고 있다. 검색 엔진은 사실상 구글의 지배 아래에 있다. 유럽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AI 챗봇은 오픈AI의 ‘챗GPT’다. 대다수의 소셜미디어 플랫폼 또한 미국 기업 소유다.

EU, 기술 주권 강화 위한 법안 추진

헨나 비르쿠넨 EU 신임 기술정책책임자는 “EU는 AI, 양자컴퓨팅, 반도체 같은 핵심 기술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기술 주권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그는 “기술 주권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올해 말 EU 집행위원회는 디지털 인프라와 관련된 새로운 입법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EU 내에서 데이터와 AI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역량을 강화하는 조항이 포함될 예정이다. 관계자들은 ‘유럽제품 구매’ 조항이 포함돼 공공기관이 클라우드 서비스를 구매할 때 유럽산을 먼저 고려하도록 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이는 사실상 미국 기업을 배제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미국 빅테크는 ‘주권 클라우드’로 대응

MS, 구글, 아마존 등 미국의 거대 기술기업들은 EU의 움직임에 발맞춰 ‘소버린 클라우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이 제품들은 데이터 저장과 처리 위치, 접근 통제 등을 통해 유럽의 데이터 보호 기준을 만족시키는 솔루션이다.

예를 들어 MS는 독일의 티-시스템과 협력해 자사 애저 클라우드의 독립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구글은 프랑스, 독일, 스페인의 현지 파트너와 협력 중이다. 아마존은 오라클과 함께 독일 정부용 데이터센터를 구축했다.

하지만 유럽 관료들은 여전히 미국 기업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모델이 진정한 의미의 데이터 통제권을 보장하는지 불분명하다. 여전히 미국 본사에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와 기술 유지관리를 담당한다”고 지적한다.

유럽판 자체 클라우드 추진은 지지부진

유럽의 자체 디지털 인프라 프로젝트는 기대에 비해 성과가 미미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한 클라우드 프로젝트인 ‘가이아-엑스(Gaia-X)’다. 민간 중심의 이 프로젝트는 유럽산 클라우드 표준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시작됐지만, 자금 부족과 복잡한 협력 구조로 인해 성과가 거의 없는 상태다.

기술 전문가들은 향후 10년간 디지털 인프라에 3000억~5조 유로(약 479조340억~7983조9000억 원)가 필요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문제는 자금만이 아니다.

크리스티안 클라인 SAP CEO는 “칩도 중요하고 데이터센터도 중요하지만, 정말 필요한 건 AI를 활용할 수 있는 인재와 노하우”라고 지적했다.

유럽의 기술 주권은 선택이 아닌 생존

업계 전문가들은 디지털 주권이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유럽의 장기적 생존과 직결된다고 본다.

앤디 옌 프로톤(Proton) CEO는 “지금 유럽이 기술 인프라에 투자하지 않으면, 21세기에서 도태된다”며 “이건 산업정책이 아니라 문명 선택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EU 고위 관계자는 “유럽은 느리게 움직이지만, 일단 방향을 정하면 멈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권세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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