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에 약 4억테라바이트(TB). 국제 시장조사기관 IDC가 추산한 지난해 인류의 데이터 생성량이다. 2003년까지 전 세계에서 축적된 데이터 총량이 약 500만TB라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수치다. 우리는 인류가 수천년간 쌓아 온 데이터를 불과 20분도 안 되어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사진과 영상 같은 비정형 데이터까지 분석 대상이 되면서 '빅데이터'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세상을 바꾸는 동력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인공지능(AI)이다.
생성형 AI를 포함한 오늘날의 AI 모델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인간의 언어·이미지·행동 패턴을 재현한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급격히 빨라진 이유는 알고리즘 자체의 개선뿐 아니라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 양과 질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데에 있다.
다시 말해 AI의 연료이자 출발점은 데이터다. 이미 시작된 세계 각국의 AI 경쟁은 결국 얼마나 많은 학습용 데이터를 확보하고 활용할 수 있는가로 귀결될 것이다.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이라는 개념은 데이터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전략적 자산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관세청은 매년 2억8000만건 이상의 통관 물품을 처리하며 방대한 데이터를 축적해 왔다. 수출입 신고와 민원 업무는 거의 전산화돼 있으며, 첨부 서류도 전자문서로 활용 가능한 형태로 분류되고 있다.
현재 관세청은 446TB 규모의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책 4억7000만권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핵심 공공 데이터 자산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관세청은 데이터 분석 기법과 신기술을 관세행정에 융합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첫째, 조직 차원에서 2020년 '빅데이터 분석팀'을 신설해 데이터 전담 기능을 강화했다. 빅데이터 분석팀은 빅데이터 기술에 기반한 정보분석 확장 플랫폼인 '빅데이터 포털'을 운영하며 업무 분야별 분석모델을 개발하고, 직원 교육을 통해 분석 역량을 확산시켜 왔다. 이를 통해 직원의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돕고, 업무를 보다 과학적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둘째, 인적자원 차원에서 데이터 분석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있다. 분석 방법론·프로그래밍 교육뿐 아니라 실제 데이터를 활용한 프로젝트를 병행해 실무 역량을 지속적으로 높이고 있다. 이러한 장·단기 교육을 통해 직원의 분석 역량이 꾸준히 향상됐으며, 관세청 전반에 데이터 분석 문화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
셋째, 시스템 차원에서 '빅데이터 포털'을 중심으로 누구나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머신러닝·딥러닝 등 AI 기술을 접목한 분석모델이 탑재돼 있어, 전문적인 기술을 모르는 직원도 데이터를 근거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현재 포털에서는 수출입 및 외환거래내역, 해외거래업체 정보 조합을 통한 수출입신고 적정성 판별, 관세행정 이해관계자 연관관계내역 시각화 및 우범요소 도출 등 30여개 모델이 운영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세계관세기구(WCO)에서는 '납세위험도 산정 분석모델'이 큰 호평을 받았다. 이 모델은 세액 추징 또는 정정 등 납세 관련 우범 확률이 높은 업체를 선별하는 모델로 수입신고내역, 검사 결과, 추징 이력 등 납세자 데이터를 학습해 업체별 위험점수를 산출한다.
과거에는 인력과 시간 제약으로 인해 대규모 수입업체 위주로 사후심사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모델을 통해 소규모 업체까지 위험도를 평가할 수 있게 됐다. 위험도가 높은 업체는 우선 심사하고, 필요한 경우 맞춤형 안내를 통해 신고 성실도를 높여 사후심사의 사각지대를 줄이고 있다. 점수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점수가 나왔는지 근거를 함께 제시한다는 점도 강점이다.
관세청은 생성형 AI를 적극 도입해 데이터 활용도를 높이고, 행정혁신을 한층 가속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오픈소스 거대언어모델(LLM)을 보안이 확보된 인트라넷 환경에 설치해 활용하는 'AI 추진 로드맵'을 수립했다. 이는 외부 서비스형 AI가 갖는 개인정보·기업정보 보안상의 제약을 극복하고, 내부 데이터와 분석모델을 안전하게 결합하기 위한 기반 작업이다.
이를 통해 모든 직원이 정형·비정형 데이터를 보다 쉽게 분석할 뿐만 아니라 AI가 법령·판례·민원 사례를 학습해 24시간 대민상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실제로 지난 7월 APEC 통관절차 소위원회(SCCP) 총회에서 시연된 '관세행정 챗봇'은 참가국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관세청은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조직 개편도 추진하고 있다. 현재의 '빅데이터분석팀'을 '인공지능혁신팀'으로 발전시켜, 산발적으로 추진되던 AI 적용 과제를 통합 관리하고 차세대 전자통관시스템에 반영할 예정이다. 앞으로 데이터 기반 행정을 정교하게 발전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기업과 국민에게 더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확대해 나갈 것이다. 그 결과 국경은 더 안전해지고, 물류 흐름은 더 신속해질 것이다.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분석하고 활용하느냐다.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데이터가 행정과 기술의 뿌리라는 점이다. 데이터의 바다는 거대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항해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관세청은 이재명 정부의 'AI 대전환' 기조에 발맞춰 'AI로 공정성장을 선도하는 관세청'이라는 비전을 항해의 나침반으로 삼고자 한다. 관세청은 AI 기반 행정을 통해 조직을 혁신하여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며,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 앞장설 것이다.
이명구 관세청장 mklee9@korea.kr
〈필자〉이명구 관세청장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밀양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또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영국 버밍엄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공직은 제36회 행정고시를 통해 첫 발을 내디뎠다. 관세청 대구본부세관장, 서울본부세관장, 부산본부세관장 등 전국 주요 세관에서 경험을 쌓았다. 세계관세기구(WCO) 사무국 파견을 통해 국제적 감각도 갖췄다. 2023년 관세청 차장으로 임명돼 올해 7월 제34대 관세청장에 이름을 올렸다. 조직 내에서는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정통 공직자와 국제통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