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차별 딛고… 재일동포, 韓·日 가교의 자산 [2025 신년특집-광복 80년 한국인의 디아스포라]

2025-01-06

(중) 자이니치, 차별 넘어 한일관계 자산으로

강제동원 등 조선인 일본행 급증

해방 후 삶도 팍팍했지만 이겨내

문학·스포츠 등 다방면 활약 펼쳐

해방 즈음 日에 설립된 민족학교 600개

교사·건물·책 등 부족에도 뜻 모아 일궈

1948년 폐쇄명령 ‘한신교육투쟁’ 단초

민족교육 거부감 여전히 日사회 만연

출입국관리·난민인정법 ‘배외주의’ 짙어

재일동포 2세 양석일 작가 세상 떠나자

日언론 “재일동포 문학 견인했다” 추모

주로 삶속의 갈등·불안한 현실 등 다뤄

최근 나오키상 등 수상하며 주목 받아

문학 넘어 법조 등 다양한 분야서 활약

일본 도쿄 미나토구 재일한인역사자료관의 요강은 ‘자이니치(在日) 코리안(재일동포)’의 뼈저리게 가난했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품이다. 자료관은 1930년대 들어 일본으로 들어오는 조선인이 점점 증가하면서 형성된 집단주거지에 대해 “상하수도가 정비되지 않았고, 공동화장실도 한두 곳밖에 없었다. 이런 거주환경에서 요강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었다”고 설명했다.

자료관의 다른 전시품 중 하나인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자이니치 코리안’에 일본 최고의 권위를 가진 나오키상,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이회성, 이양지 작가 등이 소개돼 있다. 그중 한 명인 유미리 작가는 일본 문화를 세계에 소개한 이에게 수여하는 ‘버클리 일본상’을 수상한 2022년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한국인인데 (수상을 해도) 괜찮은 건가 하는 기분도 든다”면서도 “자이니치라는 존재가 하나의 창이 되어 일본 안팎을 잇는 전망을 제시해 왔다는 의미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일본 문학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자이니치의 과거와 현재는 이만큼 차이가 크다. 가난을 극복하고, 차별에 저항해 이루어낸 위상의 변화다. 그들을 향한 일본 사회의 배척, 혐오가 일소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일본을 잇는 커다란 자산으로 성장했다.

장낙서씨의 어머니는 1933년 ‘거금’ 70엔을 주고 미싱을 샀다. 5년 전 미에현 구와나시에서 일본 생활을 시작한 뒤 주된 호구지책이었던 바느질 일거리는 미싱이 생기면서 크게 늘었다. 장씨는 “미싱은 해방 후에도 우리 가족을 지탱했다. 아이들을 먹이고 학교에 보낸 어머니와 좋은 한쌍의 일꾼이었다”고 회상했다.

밤낮없이 옷을 만들어 낸 미싱은 초기 자이니치의 고된 삶과 그것을 극복한 생활력의 상징으로 지금도 기억된다. 오사카에서 태어난 한 자이니치 2세는 친구 집에 가면 언제나 들었던 미싱 소리를 떠올리며 “아주머니(친구의 어머니)는 언제 먹고, 자는지 (알 수 없는) 신기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1905년 9월 부산∼시모노세키를 잇는 관부연락선이 취항하고 다른 항로가 잇달아 개설되자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걸쳐 매년 조선인 8만∼15만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강권적 토지조사, 산미증산계획 등으로 극심한 가난에 내몰린 이들이 ‘일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에 이끌려 바다를 건넜다.

1930년대 후반에는 일본 내 탄광, 토목공사 등에 강제로 동원된 이들이 급증했다.

해방 후에도 엄혹한 삶은 이어졌다. 실업과 빈곤이 일상을 짓눌렀다. 1952년 약 53만명이던 자이니치 중 61%가 직업이 없었다고 한다. 직업이 있다고 해도 ‘니코욘’이라 불린 일용노동자가 가장 많았다. 1950년대에는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파친코 업계에 자이니치가 대거 유입됐다. ‘자이니치의 기간산업’이 된 파친코에는 “다양한 고난을 극복해 온 재일 코리안의 노력의 흔적이 있다”고 평가된다.

◆차별과 배제, 그리고 저항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어렵고, 차별이 일상화된 삶에 자이니치는 무릎 꿇지 않았다. 자구책을 마련했고, 저항했다.

정체성 지키기의 기본은 언어였다. 어릴 적 일본에 오거나, 일본에서 태어난 2세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가르쳐야 했다. 해방 즈음 일본 각지에 민족학교 약 600개가 설립됐다. 교사, 건물, 책 등 모든 게 태부족인 상황에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돈 있는 사람은 돈을!”이란 슬로건 아래 뜻을 모았다.

당시 민족학교 설립에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조총련의 전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가 ‘공산주의 온상’이라 모함하고, 패전한 일본을 통치했던 연합군사령부(GHQ)가 1948년 1월 학교 폐쇄를 명령하자 오사카, 효고, 고베 등을 중심으로 한 한신교육투쟁이 벌어졌다. 수만 명이 모인 집회에 강경 대응이 이어지며 참가자가 사망하는 일까지 생겼지만 항의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일본 정부는 폐쇄를 중단했다.

지문날인 거부는 차별에 맞선 거대한 운동이었다. 외국인등록증 상시 휴대, 지문 채취를 골자로 한 외국인등록법에 대한 저항은 1980년 9월 한종석씨의 ‘단 한 명의 반란’으로 시작됐으나 이내 1980년대 일본 사회를 뒤흔든 시민운동으로 발전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 1983년 9월부터 시작한 서명운동에는 181만7000명이 참여했고, 1985년에는 지문날인 거부자, 유보자가 1만명을 넘었다. 2000년 4월 외국인 지문날인은 폐지되었으나 외국인등록증의 상시 휴대 의무 및 벌칙은 지금도 남아 있다.

민족교육에 대한 거부감은 지금도 일본 사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도쿄의 유일한 한국학교가 시설 노후화, 좁은 입지 등 때문에 제2학교 설립을 추진해 부지 임대까지 결정됐으나 극우 성향의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가 도쿄도지사에 당선되면서 2016년 취소됐다.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은 아베 신조(安倍晋三)정권에서 배제됐다. 도쿄도는 2021년 제정한 ‘어린이 기본조례’에서 인종, 성별, 언어, 종교, 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을 정지하고 있다. 도쿄도 홈페이지에는 조선학교가 조총련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다는 조사보고서를 다시 게재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일본 국회를 통과한 개정 출입국관리·난민인정법은 배외주의의 혐의가 짙다. 법률은 세금, 사회보험료를 고의로 납부하지 않은 외국인의 영주권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영주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것”이란 비판을 받았다. 민단 관계자는 “영주자와 그 가족이 일본 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언제든지 배제될 수 있는 매우 불안정한 입장이 됐다”며 “자이니치를 비롯한 일본 거주 외국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본 지문날인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비판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유엔위)는 지난해 6월 25일자로 일본 정부에 보낸 서한에서 “(개정된) 법률이 외국 국적 사람에 대한 차별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영주 자격이 취소되고 퇴거 명령이 내려질 경우 당사자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류 문학’ 이전 ‘자이니치 문학’

지난해 6월 자이니치 2세인 양석일 작가가 세상을 떠나자 일본 최대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은 “자이니치 문학을 견인했다”며 “농락당하는 인간 존재를 그린 ‘피와 뼈’는 (일본 유명 코미디언 겸 영화감독인) 비트 다케시가 주연해 영화화됐다”고 추모했다. 요미우리가 언급한 ‘자이니치 문학’은 일본 문단에서 존재감이 크다.

최근 몇 년 사이 일본 독서계의 한 흐름이 된 ‘한류 문학’ 이전에 한국에 뿌리를 둔 문화현상으로서 자이니치 문학이 있다. 자이니치 문학은 한국에 뿌리를 두었으나 일본에서 살아가며 겪는 갈등, 불안한 현실 등을 다루는 경향이 강하다. 유미리 작가는 자신의 문학세계에 대해 “나는 일관되게 ‘안식처가 없는 사람’에 대해 써왔다”고 밝힌 바 있다.

자이니치 작가들은 일본 문단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나오키상, 아쿠타가와상 등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1966년 다치하라 마사아키(立原正秋, 한국명 김윤규) 작가가 ‘하얀 양귀비’로 1966년 나오키상을, 이회성 작가가 ‘다듬이질하는 여인’으로 1971년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2000년에는 가네시로 가즈키(金城一紀) 작가가 ‘GO’로 나오키상을 받았다.

물론 일본 사회에서 자이니치의 활약은 문학 분야에 한정되지 않는다. 서양인 프로레슬러와 시합을 벌이며 태평양전쟁 패전 후 서양 콤플렉스를 시달리던 일본인들의 영웅이 된 역도산(한국명 김신락), 1979년 취업 차별에 맞서 최초의 자이니치 출신 변호사가 돼 많은 후배 법조인의 존경을 받는 김경득씨 등은 일본 사회 내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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