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의 온고지신] 말의 타락

2025-03-19

영현(英顯)이라는 낱말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들어본 적은 있으나 사용해 본 적은 없다. 낯설다. 사전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는 제사 때 쓰는 지방(紙榜)이다. 현대식으로 풀어쓰면, "아버님, 돌아가신 지 그 새 10년입니다. 오늘 저희가 마련한 이 자리에 오시어 함께 해 주세요."쯤 될 것이다. '현고'(顯考)와 '영현'(英顯)에 들어있는 '나타날 현'(顯)은 故人(죽은 사람)에게 '보고 싶으니 꼭 와주세요',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제사 지내면서, 후손들에게 교훈되도록 하려고 했던 그 의도(효심)는 사라지고, 이제는 그 뜻도 모른 채 부적처럼 쓰여지거나 그마저도 생략되어 사라지고 있다.

'영현백'이라는 특별한 가방이 있는 모양이다. 육군 2군단이 지난 8월 22일, 서울에 있는 종이관(紙棺) 제조업체에 연락해서, "영현, 즉 시신 이동 보관업체를 알아보고 있다. 제작소요기간은 물론 한번에 몇 개까지 운송할 수 있는가. 사망자가 예를 들어 3000개가 필요하다면 어떻겠느냐. 종이관 1000개를 구매할 경우 가격이 얼마냐"고 문의했다는 것이다. mbc의 취재결과, 군이 시신처리를 위해 민간업체에서 관을 사들인 일은 창군 이래 한번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같이 통상적이지 않은 구매상담과 별도로, 육군은 최근 시신 임시보관 물품인  '영현백'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2024년 1월에 1800여 개였던 게 12월에는 4900여 개로 크게 늘어났다. 군은 비상계엄과 관련성이 없다고 해명했다.

노상원(전 정보사령관)은 윤석열 김용현 2인조와 함께 오래 전부터 은밀하게 계엄논의를 한 것으로 의심받는다. 그의 수첩에 기록된 내용은 온국민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특히 이재명 문재인 조국 유시민 김어준 등을 나열했다. 그 리스트에 들어가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날 밤 일제히 일비일희(一悲一喜)했을 것이다. 명단에 들어가지 못한 시시한 존재로 취급받은 것을 자못 섭섭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반대로,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나는 죽지는 않았겠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인지상정이다.

군대 보급품은 1종부터 10종까지로 분류된다. 1종은 쌀, 2종은 피복, 3종은 유류, 4종은 난로다. 시체는 10종이다. 사고사든 전사든 병사든 군대에서 죽으면, '폐품'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예비역들은 군대에서 죽는 것을 '개죽음'이라고 말한다. 비상계엄의 성공은 군부가 언제 끝날 지 모르는 독재정치를 박정희 전두환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펼친다는 것을 뜻한다. 그 경우, 여기가 바로 지옥이다. '문제의 인사들'을 살해하려던 흉계를 가진 사람들의 하수인들이 그 '특별한 가방'을 대량구매해 쌓아놓고 D-day’를 기다린 것은 아닐까.

12.3 비상계엄이 주동자의 뜻대로 되었다면, 우선적으로, 그는 평소에 인간적으로 또는 정치사회적으로 몹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앞날을 위해서 제거하는 게 유리하겠다고 판단되는 인사들 수천 명을 1차로 '수거'(收去)해 여러가지 방식으로 살해했을 것이다. 일부는 어선에 실려 공해(公海) 어딘가에서 수장(水葬)시켰을 것이며, 다른 무리는 강원도 어느 깊은산속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을 것이다. 그 시신들을 '영현백'에 담아서 처리할 구상을 한 것 아닐까.

한가한 소리 같지만, '수거'와 '영현'은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이 한 입으로 해서는 안되는 말들이다. 신성한 국방의무를 수행하다가 죽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그 군인을 목숨이 끊어지는 바로 그 순간 '10종'으로 취급하는 생명관(生命觀)의 계보다.

60년 넘도록 이 땅의 봄은 참으로 잔인하다. 기화요초(琪花瑤草) 만화방창(萬化暢), 그 생명의 들판에서 벗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부르며 사는 것이 왜 이렇게도 이루기 어려운 소망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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