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

2025-02-20

지금 우리는 나라와 시대의 공통 준거를 잃었다. 사상가 함석헌의 말을 빌리면 시대의 말씀, 전체의 말씀을 잃었다. 이념과 가짜 사실, 인물과 진영의 포로가 되어 잃어도 완전히 잃었다. 지금이 바로 대한민국의 정점이라는 불행한 징표는 우리가 함께 꿈꿀 공통의 미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우리는 ‘물질’ 외에는 그 어떤 공통 목표와 공통 준거를 창출하지 못했다. 종교도 정치도 교육도 언론도 역할을 잃었다. 특히 정치와 종교는 역할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 구실에 앞장선다. 거짓과 선동, 중우와 저질이 난무하는 인터넷과 유튜브 공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내전’ 수준까지 치달은 진영 대결

공동체 미래 위해 헌정개혁 필요

지금은 비상한 ‘헌법정치’의 상황

민주공화국 영속 위해 결단할 때

공통의 미래가 실종되자 진영 대결과 혐오가 이를 대체하고 더욱 폭발하며 심리적·법률적·신체적 ‘남남 내전’으로 치달았다. 특히 진영에 인물과 이념이 더해지자 지지하는 인물에 불리하면 어떤 절차와 법률도 승복하지 않는다. 공적 권위의 붕괴 상태다. 그리하여 공적 권위와 책임을 갖고 공동체를 위한 결정을 위임받은 입법·행정·사법 기구들은 진영과 인물 위에 완전히 붕 뜬 상태다.

둘로 쪼개졌으되 같은 절차에 매몰된, ‘탄핵을 통한 청산’ 대 ‘사법을 통한 청산’, 그리고 비상계엄과 탄핵파면의 충돌을 극복할 공통 준거는 무엇일까? 두 가지다. 하나는 사법과 정치의 분리다. 두 번째는 헌정수호를 넘어 헌정개혁이다. 인류에게 정치학을 처음 제시한 대철학자에 따르면 사법은 과거를 향하며 정치는 미래를 향한다. 정확한 통찰이다. 탄핵과 사법 절차를 헌재와 법원에 맡기고, 정치는 미래를 담당해야 한다. 탄핵·사법절차와 분리된 정치의 부활이다.

헌정개혁에의 착수와 헌법개혁에의 대합의는 현재의 타협과 안정은 물론 새로운 공통 준거를 창출하는 최고의 행위가 된다. 민주화 이후 첫 탄핵소추를 당한 대통령이 개헌과 연정을 제안했을 때 이를 끝내 반대한 지도자는 본인의 집권 후 탄핵위기에 직면해서야 개헌을 주장하고, 결국 파면·구속되고 말았다. 대통령이 최초로 탄핵·파면을 당할 때 개헌과 연정을 반대하며 집권한 지도자는 적폐청산의 주체요 대상인 검찰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뒤이어 개헌을 반대하며 집권한 지도자는 지금 비상계엄 선포 이후 탄핵소추 당해 현직 대통령 최초로 구속된 상태다. 모두 사법주의와 승자독식의 패배자들이다.

비상계엄과 내란사태까지 초래한 현행 헌정체제를 방치한 채 대체 다른 무엇을 개혁하겠다는 것인가? 사람과 하위 법률을 계속 바꿨는데도 불구하고 헌정질서는 왜 이리 점점 더 나빠지는가? 지금은 사회개혁이 아니라 나라의 근본인 헌법개혁과 정치개혁에 나설 때이다. 여론조사를 통해 드러나는 국민 의사도 같다. 그러나 개헌문제에 관한 한 진보와 보수 정당들이 지지자들의 의사와 정반대의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체제의 근본인 헌정질서가 아래와 위로부터 동시에 도전받는 비상한 국면이다. 집행부의 절차와 정책, 입법부의 결정, 사법적 판결, 어느 것도 쌍방 공통의 승복 기준이 해체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사법절차와 일상 정치로는 극복할 수 없는 고도로 비상한 헌법정치 상황이다.

12월 3일 이후 ‘사법’과 ‘거리’와 ‘마음속’에서 더 악화하는 현실을 보라. 대선 이전의 절차와 결정과 판정은 물론 대선 이후엔 더 악화할 것이 분명하다. 헌법정치의 대타협에 실패한다면 집권에 성공한다고 해도 미래의 실패는 불문가지다. 헌법정치가 일상정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헌법정치에 관한 한 사람이 문제가 결코 아니다. 최근 세 대통령의 연속 실패를 보라. 왜 굳이 예정된 실패의 길을 가려는가?

시간은 문제가 안 된다. 1948년 제헌 당시 헌법정치는 헌법기초위원회 구성(6월 2일)부터 헌법 공포(7월 17일)까지 총 45일 소요되었다. 최초의 여야합의 개헌인 1960년 4월혁명 당시 헌법정치는 4월 26일 국회 개헌기초소위원회 구성부터 6월 15일 개헌 완성까지 총 50일이 소요되었다. 두 번째 여야합의 헌법정치인 1987년 6월항쟁 때는 8월 3일 여야 8인정치회담 개시부터 개헌협상 타결과 통과를 거쳐 10월 29일 헌법 공포까지 2개월 26일이 걸렸다. 헌법정치는 짧지만 타협적이며 근본적이다. 따라서 절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반대로 사법정치는 양자택일이 본질이다.

인류의 위대한 철인과 지도자와 공화국들은 나라의 토대를 마련하는 일 못지않게 영속성을 구축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로물루스 못지않게 누마 폼필리우스가, 아이네이아스 못지않게 바울이, 워싱턴 못지않게 링컨이 가장 높이 평가받는 이유다. 링컨은 이 점을 꿰뚫는 최고의 연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온몸을 던져 실천하였다. 근본이 두 쪽 난 나라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니다. 민주공화국의 보존과 영속을 위해 국회와 대표들은 가장 위대한 과업에 즉시 나설 때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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