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형사과장의 ‘크라임 노트’
제16화 피로 얼룩진 화이트데이
편의점에 들이닥친 남자
화이트데이. 거리엔 사탕과 꽃이 넘치고,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며 설렘이 이어지는 밤이었다.
경기도 A시의 한 편의점.
문이 벌컥 열리고, 한 남자가 휘청이며 들어왔다.
살려주세요. 제발, 저 좀 숨겨주세요.
그는 무언가에 쫓기듯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무언가에게 쫓기는 듯 공포에 질려 있었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는 목덜미를 타고 흰 셔츠를 적시며 번져 나갔다. 편의점 안 공기는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점원은 놀라 말을 잃었다.

경찰에…신고 좀 해주세요.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숨을 고르는 잠깐의 순간, 그의 눈빛엔 절망과 후회가 희미하게 교차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결심한 듯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점원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고, 그렇게 사건은 우리에게로 향했다.
사이렌 소리가 밤거리를 갈랐다. 평소엔 조용했던 동네가, 그날은 낯설고 차가웠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명호(가명, 45세), 인근 아파트 504호에 거주하는 주민이었다.
피가 머리에서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상처보다 집 안에 남겨진 아내의 안부를 먼저 걱정했다.
그 다급한 목소리엔 사랑과 두려움,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하얀 날의 붉은 밤
우리는 곧장 504호로 향했다.
거실은 정돈되어 있었고, 평온해 보였다. 마음 한편으론 생각했다.
혹시 단순한 가정 내 다툼은 아닐까….
그러나 안방 문을 여는 순간, 그 작은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김정란(가명, 41세)씨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아들 정형섭(가명, 19세)의 방에는 핏자국이 묻은 흰 셔츠가 널브러져 있었고, 그 옆에는 뜯긴 사탕 포장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화이트데이의 흔적은 그렇게 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다.
사건의 발단
그날 오후 6시30분.
형섭은 어머니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즐거워야 할 저녁식사,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긴장이 흘렀다.
형섭은 여자친구인 박가영(가명, 16세)의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고, 낙태 수술을 위해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어머니 정란씨에게 병원 동행을 요구했다.
안 돼. 내가 왜 모르는 아이 병원에 따라가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