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으로 사익 추구한 28대 충혜왕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이 좋고 열매가 많도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으니 내를 이뤄 바다에 이르도다.’(『용비어천가』 제2장)
옳은 말이다.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이 바람에 흔들리고 가뭄에 마를 리가 있겠나. 세종은 새 나라 조선이 그렇게 무궁하기를 바라면서 갓 만든 훈민정음으로 순우리말 노래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이 말은 틀렸다. 불과 두 세대 전에 고려 왕조가 흔들리고 말라버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500년 왕조의 멸망, 그것은 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중대한 사건이었다. 고려는 어쩌다 망했을까? 고려의 망국인(亡國因)은 직접적이고 가까운 근인(近因)부터 멀고 간접적인 원인(遠因)까지 다양할 것이나, 그 중간쯤에 충혜왕의 실정이 있다.
원 공주 출신 왕비 겁탈했다 압송
무당에도 세금 물려 사금고 채워
공무 망각하고 극단적 사익 추구
국왕 타락하자 간신들만 들끓어
결국 원에 잡혀가 유배길에 객사
공민왕 노력에도 민심 못 되돌려

고려에는 이른바 ‘충자(忠字)왕 시대’가 있다. 고려 후기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며 왕호에 충자가 붙은 시대이다. 그 전 태조·광종·성종 등이 고려 스스로 정한 묘호(廟號)인 데 비해 충렬왕·충선왕 등은 원에서 정해 보내온 시호(諡號)라는 점이 달랐다. 이름만 달라진 게 아니다. 고려 국왕은 대대로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는데, 전에는 먼저 즉위한 뒤 추인받는 형식적 절차였다면, 충자왕 시대에는 원에서 국왕을 결정해서 책봉했다. 더 심하게는 잘 있는 왕을 폐위하고 새 왕을 세우기도 했다. 책봉 철회가 곧 폐위의 효력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자주성은 심각하게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당시 사람들은 그나마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나라가 없어지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던 것이다.
원 책봉 받아 왕 된 후 납득 어려운 행적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차지했을 때 국가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의 금·남송을 비롯해서 서쪽으로 탕구트, 카라 키타이, 호레즘, 아바스 왕조 등 번성했던 나라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고려만은 국호와 왕실, 영토와 인민, 제도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남았고 그런 가운데서 원의 간섭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국가 운영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망국에 이르지 말아야 하고 아무리 불리한 조건에서도 국익을 포기하지 않는 것 말이다. 다만, 외세의 간섭이 강한 때일수록 유능한 국왕이 나왔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충렬왕은 원의 간섭을 줄였지만 국내 정치에서 실패했으며, 충선왕은 자신감이 지나쳐 자멸하고 말았다. 충숙왕은 무능하고 정치에 무관심했으며, 충혜왕은 사욕이 앞서 패가망국(敗家亡國)의 위기를 자초했다. 그 다음 충목왕과 충정왕은 모두 어렸다. 이 가운데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행적을 보인 것이 충혜왕이다.

충혜왕은 두 번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충숙왕이 원에 의해 폐위되었을 때 한 번, 그리고 충숙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또 한 번 즉위했다. 그러니 고려 국왕 계보가 ‘숙-혜-숙-혜’가 된다. 부자간에 왕위를 주고받은 것부터가 비정상이지만, 두 왕 사이가 좋지 않아서 왕이 바뀔 때마다 전 왕의 총신들을 숙청하는 피바람이 불었다. 게다가 이 싸움에 원의 권력자까지 개입해서 혼란을 더했다. 충혜왕의 첫 즉위는 원의 권신 엘테무르에 의한 것이었다.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엘테무르가 고려 국왕마저 자기 마음대로 교체했고, 당시 16세이던 충혜왕은 엉겁결에 왕이 되어 아버지와 대립했다. 하지만 대청도로 유배와 있던 황태자 토곤테무르와 반란을 모의했다는 소문 때문에 속절없이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1차 재위의 전말이다. 충숙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당연히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엘테무르 사후 권력을 잡은 바얀의 반대에 부딪혔고, 또 따른 정변으로 바얀이 죽임을 당한 뒤에야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새 궁궐 짓고 궁녀 시켜 직물 생산도

충혜왕은 이렇게 남의 나라 정쟁에 깊이 휘말렸다. 하지만 그의 실정이 반드시 외부 요인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자신이 주색을 좋아하고 놀이와 사냥에 탐닉했으며 황음무도하다는 말까지 들었다. 국왕 주변에는 ‘악소(惡少)’라고 불리는 무뢰배들이 득실거렸고 이런 자들이 호가호위하며 남의 재산을 빼앗는 등 온갖 불법을 저질러도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제지하지 못했다. 불량스럽기는 충혜왕도 만만치 않았다. 누가 예쁘다는 말만 들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남의 부인이라도 달려가 빼앗았다. 아버지 충숙왕의 왕비들까지 겁탈했으니 그 인면수심은 말하기조차 민망하다. 그 가운데 원 공주 출신 왕비를 겁탈했다가 고소당해 원에 압송되기까지 했다. 국왕의 체면이 대체 어찌 되었겠는가. 그럼에도 충혜왕은 영예(英銳)하다는 평을 들었다. 영민하고 예리하다는 뜻인데, 특히 재산을 늘리는 데서 재능을 발휘했다. 보흥고라는 사금고를 만들어놓고 국왕의 지위를 이용해서 재산을 모았다. 직세(職稅)를 신설해서 지방에 사는 관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무당들에게 무세(巫稅)를, 배 가진 사람들에게 선세(船稅)를 징수했다. 이렇게 거두어들인 세금은 국고로 들이지 않고 자신의 사금고를 채우는 데 썼다.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왕이 여느 권력자들처럼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마구 빼앗기까지 했다. 백성들이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 있었겠나.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소란하고 동요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재산 증식을 위해 또 한 가지 한 일이 있었다. 바로 무역이었다. 왕과 교역하기 위해 위구르 상인들이 고려를 오갔고, 왕은 관리를 시켜 원에 가서 물건을 팔게 했다. 충혜왕이 주력 상품으로 생산한 것이 직문저포라는 직물이었다는 흥미로운 연구가 있는바(이강한, ‘어떤 제국과의 조우’)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궁궐에 생산 시설까지 갖추어놓았다. 새 궁궐을 짓고 그곳에서 궁녀들에게 직물 만드는 일을 시켰으며, 방아와 맷돌 같은 기구가 많이 있었다고 하니 영락없는 작업장이었다. 하지만 국왕의 경영 수완을 그저 칭찬할 일이 아니다. 이 궁궐에 들어가 일하기를 거부한 여자 둘을 충혜왕이 쇠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사건이 있었던 것을 보면 잔혹하고 엽기적인 갑질 경영이었다. 무역의 이익은 당연히 충혜왕 개인의 몫이 되었다.
원에 아부하려 재산 모았다는 추측도

충혜왕은 왜 이렇게 재산을 모으려고 했을까? 나라 전체가 왕의 것인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병적인 물욕이 아니라면 개인적인 사용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왕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원의 권력자에게 뇌물을 주려던 것이 아닐까 추측되기도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일말의 동정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일국의 국왕으로서 그러면 안 될 일이었다. 국왕이 공적인 책무를 망각하고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때 그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온 나라가 사욕의 용광로가 되었다. 국왕 주변에는 아첨하는 간신들이 들끓고, 관리들은 그런 국왕의 눈치만 보고, 백성들은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충혜왕의 말로는 더없이 비참했다. 원에서 개입해서 왕을 잡아갔다. 충혜왕의 무책임한 정치로 인해 고려에 대한 간섭조차 힘들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사신이 왕을 발로 차고 포박해서 대도(베이징)로 압송했고, 거기서 2만 리 떨어진 게양현(광둥성 지에양시)으로 유배했다. 충혜왕은 아무도 따르는 사람이 없어 손수 옷 보따리를 들고 유배 길에 올랐고 도중에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국왕이 원에 잡혀가고, 멀리 유배 가고, 객사하는 비극이 연속되었지만 고려에서 원에 대한 반감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다시 살날을 보게 되었다며 기뻐 날뛰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고려 왕실에 대한 민심 이반은 이때부터 본격화되고 있었다.
충혜왕의 그림자는 짙고 깊었다. 그 뒤로는 충혜왕이 사익을 추구한 탓에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하지만 공민왕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끝내 민심을 되돌리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렀으니 충혜왕의 실정이 망국인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마침 정도전이 충혜왕 때 태어났다. 그가 훗날 정치사상을 정리하면서 무엇보다도 국왕의 공적 책임을 강조하고, 권력이 국왕에게 있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틀림없이 충혜왕을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