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우승자를 선택하는 순간, 패배자가 생긴다

2025-12-10

내년이면 산업 국가주의가 완성됐다고 평가받는 3차 경제개발 계획이 완료된 지 50년이 된다.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차 때 국가가 나서서 산업 기반을 깔고, 2차 계획에서 수출주도형 경제 기틀을 만들고 3차 땐 중화학공업을 완성했다. 이후 50년 동안 수출 대기업 체제의 한국 경제가 공고화되는 시간이었다. 이제 우리는 굳어진 대기업 위주 경제의 성벽을 더 높게 쌓으려는 기로에 서 있다.

모두가 반도체 전쟁과 인공지능(AI)을 말한다. 미국은 관세를 무기로 외국 기업에 자국 투자를 끌어내고, 엔지니어와 과학자로 무장한 중국은 예산을 퍼붓는다. 일본도 수십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지었다. 대만 TSMC를 키운 건 정부였다. 한국도 국가 간 경쟁에서 예외일 수 없다.

달러 벌기 위해 닥치고 수출

대기업엔 규제 풀고, 세제 혜택

독점·수도권 고착화 구조 형성

중요한 건 성장의 과실 나눠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자 대한상의 회장은 지난 5일 세미나에서 “이제 한국에 남은 시간이 5년”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0%로 떨어지기 전, 즉 한국 경제의 체력이 고갈되기 전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선 국가 지원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그는 “AI 시장에 제대로 뛰어들어 경쟁하려면 7년 안에 1400조원을 집어넣어 20기가와트 정도의 데이터센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SK와 SK하이닉스가 감당해야 할 투자 규모는 현재 규제가 있으면 불가능하다며 지주사 체계의 손자회사·증손회사 지분율 요건 완화도 거론했다. 정부 역시 지주회사의 증손회사 지분율 완화, 금산분리 예외 인정을 허용하면서 발맞추고 있다. ‘나라경제를 위한 투자’라고 하지만 총수의 적은 지분으로 그룹 내 지배력을 확장하고 금융회사도 둘 수 있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달러를 벌어오는 수출 기업을 위해 닥치고 뛰라는 ‘다그침’은 낯설지 않다. 지난 70년, 한국 경제가 수출 대기업을 위해 규제를 풀어주고 세제 혜택도 주는 등 그간의 과정을 우리는 익히 안다. 그 결과, 소수의 대기업 독점 구조가 형성되고 하청과 납품 중심의 중소기업과 수도권 중심의 생태계가 고착화됐다. 오랜 구조는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이재명 정부로 바뀐 지금도 2025~2029년 기획재정부의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나라살림연구소가 분석한 결과, 대기업이 가져가는 조세감면 혜택 비중은 15.7%에서 16.5%로 늘어난다. 중소기업에 돌아가는 조세감면 혜택 비중은 71.9%에서 71.1%로 줄어든다. 대기업이 연구·개발 투자를 많이 한 영향이라고 하지만 정부의 재정 방향이 여전히 대기업 중심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기업이 잘나가야 GDP 숫자가 좋아질 테지만 성장의 과실이 흘러내려 오지 않는다는 건 많은 연구로 증명됐다. IMF가 상위계층의 소득 증가와 GDP 성장률 상승의 연관성이 떨어진다고 회의론을 공개적으로 말한 때가 벌써 10년 전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한국의 불평등은 더 악화됐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 순자산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순자산 지니계수는 0.625로 2012년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소득 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균등화 처분가능소득 기준)도 지난해 0.325로 전년 대비 0.002포인트 증가했다. 2021년 이후 가장 높다. 자산도, 소득도 불평등이 더 심해졌다는 의미다.

반도체 회사를 다니는 대기업 직장인의 성과급이 수천만원~억원 단위가 나온다고 해도 배달 라이더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 미국 경제에서 나타난다는 K자 양극화 현상, 즉 고학력·고소득 노동자는 경제 침체에서 빨리 회복하는 반면 저학력·저소득 노동자는 침체의 수렁에 빠지는 구조가 한국에서도 뚜렷해지고 있다. 대기업·고소득층·수도권 중심의 ‘성벽’ 구조가 더 공고해지기 전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

대통령이 재벌 회장과 잇따라 만나 투자를 강조하고 필요하다면 규제를 풀어야 하는 현실도 이해는 된다. 그래도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성장의 과실을 나누도록 체계를 만들고 조세정책과 복지·재정 정책부터 다시 검토하는 일이다. 대기업 주도의 경제 전략만으로는 악화일로의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없다. 한국 경제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재정·세금과 복지, 분배 구조를 다시 고민해야 한다. 정부가 누군가를 우승자로 선택하면 어디선가 패배자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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