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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우리나라는 국민 안전을 위해 무선설비 등의 전자파 영향을 고려한 '전자파 인체보호기준'을 정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비전리복사방호위원회(ICNIRP) 인체보호기준의 권고와 한국전자파학회,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등이 연구·제안한 '전기장 노출에 대한 인체보호기준'을 바탕으로 마련됐다.
당시 전자파학회는 '전자장과생체관계연구회'를 발족해 세계 각국에서 시행 중인 기준들을 검토하고 전자파의 인체 영향에 대한 과학적 연구결과를 통해 '전자기장 노출에 대한 인체보호기준'을 발표했다.
당시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 전자파강도 기준은 학회 권고안을 수용하고, 휴대전화에 적용되는 '국부 전자파흡수율 기준'은 미국이 채택한 IEEE C95.1 기준(1g 평균 1.6W/㎏)을 채택했다. 대부분 국가가 채택한 기준(10g 평균 2W/㎏)에 비해 엄격한 국내 전자파인체보호기준이 마련됐다.
휴대전화의 인체 근접 사용, 높은 사용 빈도 등을 고려해 WHO 권고보다 엄격한 기준을 채택함으로써, 국민 건강 보호 강화뿐만 아니라 국내 휴대전화의 국제경쟁력 확보까지 염두한 정책적 판단이었고 결과적으로 실효성을 거뒀다고 생각한다.
이로부터 20여년이 지난 현재 국제 전자파인체보호기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5G 이동통신과 같은 초고주파수 사용기기 확산, 전자파 인체 영향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 등을 반영해 국제 전자파인체보호기준 IEEE C.95.1(2019)와 ICNIRP(2010, 2020)이 개정됐지만 일본, 호주를 제외하고 대부분 국가에서는 개정된 기준을 도입하지 않고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IEEE와 ICNIRP의 국부 전자파흡수율 기준이 우리보다 유연한 기준(10g 평균 2 W/㎏)으로 동일하게 됐다는 점이다. 우리도 전자파인체보호기준 개정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된다. 주요 국가들의 개정 추이를 살피면서 국민과 산업계, 전문가 등의 의견을 청취하고 과학적 근거, 개정 효과 등을 꼼꼼히 따져 신중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
전자파인체보호기준 수립 시 필자가 생각하는 필수 고려사항은 첫째 과학적 증거 기반의 기준, 둘째 최악의 상황을 고려한 보수적인 기준, 셋째 생활 환경 내 모든 전자파로부터의 인체보호가 가능한 종합적인 기준이다. 정책적 실효성도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 이러한 원칙과 더불어 국민 모두 안심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자의 협의와 사회적 합의를 거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전파 분야 전문가는 국민 건강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인체보호기준이 수립될 수 있도록 전파 기술 및 환경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찰,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검토와 분석을 통해 국내 실정에 맞춘 인체보호지침을 마련해 제시해야 한다.
시민단체는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국민의 건강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인체보호기준이 마련되도록 과학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의견을 담은 국민의 목소리를 제시해야 한다.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종합적이고 균형있는 검토와 충분한 숙의를 거쳐 새로운 전파환경에 부합하고, 국민이 신뢰하고 수용할 수 있는 전자파인체보호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전자파 위험성에 대한 인식과 문화의 정착은 정부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할 공동의 과업이다.
최형도 ETRI 책임연구원·한국전자파학회 전자장과생체관계연구회 위원장 choihd@et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