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미의감성엽서]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

2025-12-02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이다. 앞으로 한 달만 지나면 새해가 된다. 새로운 해가 뜬다. 나는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며 올 한 해 내 마음에 꼭 들었던 꽃, 해국을 떠올린다.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이 그린 ‘해국’. 해국은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꽃으로 남쪽 바닷가에서 자라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이름 그대로 바다 ‘해(海)’와 국화 ‘국(菊)’이 합쳐진 말로, ‘해변국화’라고도 불린다. 해변국화라니, 얼마나 예쁜 이름인가.

그 이름에 맞게 해국은 햇볕이 잘 드는 해안가 절벽이나 경사진 암벽에 자라는 꽃이다. 키는 작지만, 건조와 염분을 잘 견디고 생명력이 강한 꽃으로 한여름부터 11월 늦가을까지 연보라색 예쁜 꽃을 피운다. 두상화서(여러 꽃이 꽃대 끝에 모여 머리 모양을 이루어 한 송이의 꽃처럼 보이는 것)라 멀리서 보면 암벽 사이사이에 누군가가 꽃다발을 갖다 놓은 것처럼 예쁘고, 소담스럽다.

지난달 수업 시간 끝에 우리 반 김현주씨가 선물한 ‘국화차’. 나는 그 국화차를 해국차처럼 마신다. 그러면 그 국화차에서 그리운 남쪽 바닷가 냄새가 나고, 라울 뒤피가 그린 바이올린 그림들이 생각나고, 그중에서도 ‘푸른색 바이올린’ 그림이 떠오른다.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태어나 바다를 보고 자란 라울 뒤피. 그의 그림 밑바닥엔 언제나 경쾌한 파도 소리와 푸른 바다가 스며 있다. 마치 그림 속 모든 풍경과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한 음표를 지닌 물고기들인 것처럼. 그 때문인지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해국을 볼 때마다 뒤피의 그림이 생각나고, 그 그림 속에서 드뷔시의 ‘바다’가 흘러나오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그 멜로디를 따라가게 된다.

올 한 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스파크에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탓에 한동안 카프카에스크에 시달렸는데 이제는 괜찮다, 괜찮다. 이소영의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식물세밀화와 뒤피의 바이올린 그림과 김현승 시인의 ‘가을 시’와 산문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평심을 되찾았다. 우리나라 옛 시인들의 시를 하나하나 찾아 다시 읽기를 참 잘한 것 같다. 역시 나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과 훨씬 소통이 잘 되는구나. 새삼 다시 한번 더 느끼는 ‘유령과의 반짝반짝 데이트!’.

이제 곧 눈이 내리고, 해국도 지겠지. 그러나 꽃말이 ‘기다림’ 혹은 ‘고요한 사랑’이니 다시 필 때까지 얼마든지 조용히 기다려줄 수 있다. 우린 바다를 사랑하는 같은 종이고, 같은 과니까. 긴 겨울 동안 따뜻한 국화차를 마시며 뒤피의 바이올린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드뷔시, 바흐, 모차르트를 들으며, 기쁘게 올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새해가 온다는 건 언제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니까.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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