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서 디지털 보험사가 사라지고 있다. 높은 규제 벽과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혀 사실상 교보라이프플래닛과 카카오페이손해보험 두곳만 남게 됐다.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다음달 10일 한화손해보험은 자회사 캐롯손해보험을 흡수합병할 예정이다. 캐롯손보는 지난 2019년 출범한 국내 최초 디지털 손해보험사로, 자산을 기준으로는 최대 디지털 보험사다. 적자를 지속한데 더해 건전성까지 악화되자 모회사에 흡수합병이 결정됐다.
캐롯손보 소멸로 우리나라에 디지털 보험사는 교보라이프플래닛(생명보험)과 카카오페이손해보험(손해보험)만 남게 될 전망이다. 그간 디지털 보험을 표방했던 회사들도 디지털을 포기하며 대면 영업을 강화하는 추세기 때문이다.
보험업법 시행령 제13조에선 총 보험계약 건수 및 수입보험료 90% 이상을 △전화(TM, 텔레마케팅) △우편 △컴퓨터통신(CM, 온라인채널) 등 통신수단을 이용해 모집하는 보험사를 통신판매전문보험회사(디지털 보험사)로 규정하고 있다.
올해 1분기 해당 기준을 충족하고 있는 보험사는 교보라플과 카카오손보 뿐이다. 교보라플과 카카오손보는 온라인채널 판매 비중이 100%, 캐롯손보는 89.1% 수준이다.
지난 2020년 출범 당시 디지털 보험사를 표방했던 하나손해보험은 최근 오프라인 대면 영업을 강화하며 디지털 타이틀을 떼고 있다. 모집채널별 수입보험료 기준 지난 2023년 1분기 80.8%에 달했던 통신판매(CM, TM 합산) 비중이 올해 1분기 73.1%까지 축소됐다.
신한금융이 BNP파리바카디프손해보험을 인수하며 탄생한 신한EZ손해보험도 디지털 보험사로서 정책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대면 영업이 주력인 일반 손해보험사다. 올 1분기 통신판매 비중이 3.3%에 불과해 대면 영업 의존도가 95% 이상으로 나타났다.
출범 이래로 흑자를 기록한 디지털 보험사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선 구제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디지털 보험사가 시장에 다양성과 소비자 편익, 혁신적인 상품을 제공하는 등 순기능이 있음에도 생존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우려다.
특히 일률적인 건전성 규제는 디지털 보험사 운영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해외에선 보험사 규모에 따라 차등규제가 적용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소규모로 운영되는 디지털보험사에게 일반보험사와 동일한 건전성 요건이 적용돼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설명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디지털 보험사가 사업 확장을 위해 디지털 관련 자산에 투자하면 높은 위험률이 반영돼 건전성 지표(지급여력·K-ICS비율)가 악화되는 구조”라며 “비교적 소규모로 운영되는 회사별 특성을 감안해 규제가 완화를 논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6월엔 김영석 교보라이프플래닛 대표가 직접 제도적 지원 필요성을 피력한 바 있다. 보험연구원 디지털 보험시장 세미나에서 김 대표는 “높은 법적 요건 등 한계로 적자가 지속되고 있고 신규 사업자 유인 제한과 생태계 조성 미진으로 산업 성장이 정체돼 있는 상태”라고 평가했다.
박진혁 기자 s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