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모르는, 이름을 알 수도 없는, 알고자 할 필요조차도 없는 씨알 여러분! 하늘의 맑음, 땅이 번듯함 속에 안녕하십니까? 물의 날뜀, 바람의 외침 속에 씩씩하십니까?” 함석헌 선생이 ‘씨알의 소리’ 1974년 6월호를 통해 독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인사말이다. 긴급조치가 발령되어 엄혹했던 시기, 모두가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던 때 그는 독자들의 안부를 묻는다. 그냥 잘 있느냐는 인사가 아니라 정신이 살아 있냐고 묻는 것이다. 그때로부터 꼭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인사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으밀아밀 계엄을 모의하고 실행한 이들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어둠은 치밀하고 끈질기고 강고하다.
하지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물의 날뜀, 바람의 외침 속에서 씩씩하게 일어선 이들의 존재가 그 증거다. 차가운 강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12월의 광장으로 달려 나온 이들은 역사의 맥박이 여전히 힘차게 뛰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응원봉을 들고 거리에 나온 숫접은 젊은이들은 엄숙하고 긴장된 시간을 아름다운 화합의 장으로 바꾸어냈다. 시민들이 든 깃발과 손팻말에 적힌 문구들은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려는 이들에 대한 유쾌한 반란이었다.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광장에 웃음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산문적 현실 속에 깃든 시적 순간을 경험했다. 직접 참여하진 못해도 선결제로 연대의 마음을 전하는 이들이 많았다. 휴가를 위해 여퉈둔 돈을 털어 키즈 버스를 대절한 이도 있었다. 아기들과 동참한 젊은 부부들이 젖을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섬세한 상상력이 광장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광장에 흘러넘치는 생기를 경험한 이들은 우리 속에 깃든 거대한 가능성에 스스로 놀랐다. 동학혁명, 3·1 만세운동,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혁명으로 이어지는 유장한 저항의 흐름에 명랑한 정조까지 덧입혀졌다. 역사를 겨울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주동 인물인 오스카 마체라트는 파시즘의 광기에 사로잡힌 아버지와 두 명의 남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어머니를 보며 성인의 세계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그는 스스로 성인이 되기를 거부하며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성장을 멈춘다. 그는 늘 양철북을 들고 다닌다. 양철북은 소통의 수단인 동시에 저항의 수단이다. 오스카는 어른들의 폭력적 행동이나 음란 행동을 목격할 때마다 고주파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러 주변의 유리를 다 깨뜨린다. 소리 또한 그의 저항의 수단이다.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 <양철북>에는 매우 상징적 장면이 나온다. 오스카는 어느 날 자기의 분신 같은 양철북을 메고 아버지가 참여하고 있던 나치의 선동장에 숨어든다. 총통이 보낸 나치 지도자를 환영하기 위해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고 군인들이 질서정연하게 행진할 때, 연단 아래 숨어 있던 오스카는 흥분을 못 감추고 자기 양철북을 치기 시작한다. 군인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른 북소리로 인해 박자를 놓치고 스텝이 꼬여 허둥거린다. 악단 역시 갈팡질팡하다가 소리의 혼돈에 빠진다. 다음 순간 작가의 빛나는 상상력이 작동된다. 악단이 연주하던 행진곡이 돌연 왈츠곡으로 전환되고 군중이 곁에 선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급기야 나치의 군인들까지도 그 춤판에 끼어든다. 선동하는 말과 전체주의적인 광기가 넘치던 광장이 축제의 현장으로 바뀐 것이다.
광장에서 빚어진 생기가 정치적 혼돈 속에서 속절없이 스러지지 않아야 한다. 동지를 지나면서 어둠이 조금씩 조금씩 물러가고 있다.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셈법이 차가운 겨울바람이 되어 건강한 시민들이 애써 피워낸 꽃봉오리를 얼어 죽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가장 엄혹한 시기에도 평화로운 세상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민중적 상상력 또한 지속되어야 한다. 뿌린 씨가 싹이 트지 않을 때 농부들은 움씨를 뿌린다. 포기할 수 없기에. 명랑함으로 시대적 우울을 돌파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