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천재의 싸움은 늘 짜릿한 전율을 준다. 팽팽한 긴장감 속 작은 균열을 파고들어 상대를 꺾는 승부사의 모습이 맥박을 뛰게 만든다. 1980~1990년대 바둑계를 제패했던, 조훈현의 호방한 기풍이 그랬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바둑 레전드 조훈현(이병헌)과 제자 이창호(유아인)의 대결을 다룬 '승부'도 큰 관심을 받았다. 주연 배우 유아인의 마약 투약 논란으로 다소 빛이 바랬지만, 작품에 무슨 죄가 있을까. '승부'는 실존 인물의 일화를 차용하면서도 적절한 각색과 개입으로 매력적인 성장담을 탄생시켰다.

정상급 배우들이 두 리빙 레전드를 연기하니 천재성의 격돌에 전율하고 싶은 관객들이 많았을 테다. 그런 모습도 영화의 풍미를 돋우긴 하나 '승부'는 두 남자의 '알 깨고 나오기' 우화가 짙게 깔려 있고, 이들의 심리적 갈등과 해소가 맛스러운 작품이다. 영화의 주요 테마인 성장과 자기 극복은 바둑이라는 영역을 넘어 인생의 보편적인 교훈으로 확장된다.
창호는 그저 바둑이 재밌는 천재 소년이었다. 신발끈도 제대로 묶지 않고 다면기(多面棋, 한 명의 기사가 여러 명의 상대와 동시에 대국)를 두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자유롭고 즉흥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세상이 즐겁고 나의 존재감이 기뻤다.
다듬어지지 않은 천재를 훈현이 거뒀다. 바둑의 기본이 어떤 것인지, 예의란 무엇인지, 바둑기사로서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 엄하게 타이르고 아빠처럼 보듬었다. 창호를 위해 신발끈을 묶어줬다. 자신이 주무르는 바둑 세계에 안착할 수 있도록 따스히 인도했다.
창호는 부쩍 자랐다. 훈현의 은혜가 고마우면서도 때로 의구심이 들었다. 반발하기도 했다. 치열한 복기를 거듭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바둑을 찾았다. 창호는 이제 혼자서도 신발끈을 묶는다. 신발끈을 향하는, 스승 훈현의 친절한 손을 사양한다.
소설 '데미안'에서는 이 우화를 이렇게 표현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창호는 훈현이라는 알 속에서 보호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스승을 극복하고 나서야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고, 자신만의 세계가 생겼다.
훈현은 어떤가. 패색 짙은 상대 앞에서 다리를 떨고 콧노래를 부르며 이죽거리던 남자… 창호에게 예의를 가르치던 모습과는 달랐다. 그건 결코 강자의 긍지가 아니었다. 약육강식의 논리를 철저히 떠받들며 자신의 입지를 지키려는 수컷의 으스댐이었다. 그 시절 훈현은 가장 강했지만, 내면으로부터 진정한 성장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자신이 키운 제자의 비수를 맞기 전까진…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던 남자는 '프로기사의 의무는 이기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도전으로부터, 그리고 잔뜩 깨지며 실패를 맛보는 경험으로부터 더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그는 지면서도 이기는 길로 향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실존 인물, 실제 이야기와 다른 지점도 많지만 '승부'는 이병헌과 유아인의 압도적 열연을 통해 인물의 내면적 변화를 탐구한다. 기존의 사고방식과 다른 시각을 받아들일 때, 익숙한 보금자리에서 벗어나 도전할 때 사람은 비로소 성장한다는 것. 지켜오던 틀을 깨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두려울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이 승부를 통해 성장의 꼬리 물기를 이뤄낸다.
각각 무심(無心)과 성의(誠意)라는 바둑 철학으로 나뉜 두 사람의 조화가 최상의 승부 자세를 만든다는 점에서도 영화는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훈현은 무심, 즉 마음을 두지 않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방식을, 창호는 성의, 즉 신중하고 성실하게 임하는 방식을 통해 각각 승리의 길을 걸어간다.
두 철학을 균형 있게 결합할 때 비로소 진정한 승리를 맛볼 수 있을까. 우리는 인생의 승부에 이들처럼 뜨겁게 임하고 있을까. 서늘한 바둑판 위 뜨거운 착수가 깊은 울림을 안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