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운영 한인 햄버거 업소
주민들 위한 ‘지원 행사’ 열어
500여명 참석해 공동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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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인데, 다들 미소를 짓고 있다.
“마미! 파피!”
곳곳에서 이기선(81), 유정자(75)씨 부부를 부르는 소리다. 이씨 부부는 엄마, 아빠 대하듯 자신들을 부르는 이들을 친근하게 꼭 안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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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후 1시, 알타데나 ‘페어옥스 버거(Fair Oaks Burger)’ 주차장이 500여 명의 주민들로 북적였다. 38년 간 햄버거 가게를 운영해온 이씨 부부는 이날 산불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을 위해 ‘알타데나 지원 행사(Altadena Wellness Event)’를 개최했다. 커뮤니티 활동가로 일하는 수잔 박씨가 소셜미디어(SNS) 홍보 등을 통해 행사를 도왔다. 이씨 부부는 이날 집에서 만든 치킨 타코 1000인분을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주변이 다 잿더미가 된 가운데 페어옥스 버거만 화마를 피해갔지만 수도 등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 식당 영업은 중단한 상태다. 식당 주방 대신 집에서 타코를 준비해온 이유다.
아내 유씨는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며 “알타데나 주민들은 우리를 오랜 시간 찾아준 고객이자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고 말했다.
길 건너편에서 비즈니스를 하다 산불로 인해 가게가 전소된 한 백인 할머니는 이날 이씨 부부에게 “너희 부부를 다시 보게 돼 너무 기쁘고 꼭 다시 영업을 재개하길 바란다”며 “당신들이 만드는 햄버거를 꼭 다시 먹어보고 싶다”고 응원했다.
이번 행사는 알타데나 지역 사회의 재도약을 위해 마련됐다. 특히 산불 피해 이후 이 지역에서 민간 주도로 열린 첫 구호 행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날 현장에는 이씨 부부가 지원 행사를 연다는 소식에 월드푸드뱅크, 알타데나2030, 피드더칠드런, 월드클래스키친 등 7개의 비영리 단체가 동참해 통조림 식품, 물, 간식, 옷, 손 세정제 등 생필품을 지원했다. 재난관리청(FEMA)과 중소기업청(SBA) 관계자들도 참여해 피해 보상과 일자리 상담 등을 진행하며 도움을 제공했다.
남편 이씨는 “다시 문을 열고 싶지만 오랜 단골들의 집이 모두 타버려서 영업을 재개한다 해도 그들이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암울한 상황인데도 동네 주민들이 우리 가게 건물이 불에 타지 않은 것을 보고 나보다 더 기뻐해주더라”고 말했다. 이는 이씨 부부가 주민들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역 사회가 다시 일어서도록 힘을 보탤 수 있는 원동력이다.
행사를 기획한 수잔 박씨는 “알타데나는 자체 행정기관이 없어 피해 복구가 늦어지고 있다”며 “관할인 LA카운티 정부의 후속 조치가 늦은 데다 인근 지역인 패서디나시의 지원도 부족하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서로를 돕는 방안을 계속 모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씨 부부도 영업을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공생의 가치를 실천하고 있다. 영업은 중단했지만 정직원 5명에게 계속 임금을 지급한다.
이씨는 “직원이기 전에 모두 우리의 이웃이고 다들 가족도 있기 때문에 상황이 어렵지만 계속 봉급을 주고 있다”며 “다들 수십 년 간 이 가게에서 함께 일하면서 같이 삶을 살아온 직원들이라서 어려움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전했다.
이날 현장에 나와 타코를 나눠주는 봉사자들도 이씨 부부의 두 딸과, 페어옥스 버거의 직원들이었다.
이씨는 “여기에 줄을 서고 있는 주민 대부분이 우리 식당의 오랜 단골들”이라며 “우리를 가족처럼 여겨줘서 우리가 더 감사하다”고 말했다.
끈끈한 유대감은 잿더미 속에서도 웃을 수 있게 만든다. 화마도 공동체 의식은 꺾지 못했다. 알타데나는 그 힘으로 다시 일어서고 있다.
알타데나=김경준·강한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