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진의 계정공유] 국어사전에서 '핏줄'을 고쳐 쓴다면 '조립식 가족'

2024-11-22

[비즈한국] 한 식탁에서 같은 밥을 먹고 자란 세 아이가 있다. 윤주원, 김산하, 강해준. 엄마는 없고 아빠가 둘이다. 아마 해외라면 게이 커플이 아이 셋을 입양한 가족인가 추측할 만하다. 실제로 세 아이는 흔한 말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 그러나 이들은 세상 그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다정한 기억을 공유하는 가족이다. 핏줄도 다르고 성도 다르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색적인 가족을 그린 드라마 ‘조립식 가족’ 이야기다.

윤주원(정채연)은 어릴 적 엄마를 잃었지만 세상 누구보다 자신을 살뜰하게 돌보는 아빠 윤정재(최원영)가 있다. 사고로 여동생을 잃은 김산하(황인엽)는 그 사고로 자신을 탓하며 떠나간 엄마 권정희(김혜은)로 인해 마음 속 깊이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를 달래주고 엄마 대신 가족이 되어준 이들은 아래층 사는 주원이네. 주원이네로 인해 가족이 생긴 사람은 산하뿐만 아니다. 딱 한 번 윤정재와 맞선을 보았다가 사라진 강서현(백은혜)의 아들 강해준(배현성)도 있다. 서현이 갑작스럽게 돈 벌러 떠나며 해준을 남기고 떠나자, 그 딱한 모습을 보다 못한 정재가 해준을 데려다 키웠다. 해준은 정재를 아빠로 부르고, 주원이를 여동생으로 대하며 10년을 한 집에 살았다. 여기에, 떠난 아내 대신 아들 산하를 살뜰히 돌보는 윤정재와 부부 아닌 부부 케미를 형성하는 산하 아빠 김대욱(최무성)까지. 참 기묘한 가족 구성이다. 

핏줄만 가족이라고 여기는 건 요즘 시대에 촌스러운 것 같지만, 그럼에도 핏줄 아닌 관계의 사람들끼리 산다고 하면 으레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하는 촌스러운 정서가 한국엔 남아 있다. ‘조립식 가족’처럼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서로의 처지를 대강 알고 사는 작은 동네라면 더더욱 그런 정서가 강하다. 그렇기에 드라마 초반부에 윤주원은 아빠들끼리 ‘양자결연’을 해서 성(姓)을 통일하자고 강력하게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하긴, 2024년에도 태어날 아이에게 아빠 성 대신 엄마 성을 물려주었다간 재혼 가정이라 의심받을 거라며 고민하는 사람이 숱한 걸. 2013년에 열일곱 살이던 윤주원이 너무나 아끼는 오빠들과 같은 성을 공유하며 남들에게도 인정받는 가족이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혈연 관계와 법적 관계를 아예 무시할 순 없다지만, 생각해보면 혈연과 법적 관계로 엮었어도 남보다 못한 관계도 세상엔 수두룩 빽빽이다. 당장 산하의 엄마도 사고로 딸을 잃은 상처를 산하 탓을 하며 매몰차게 어린 아들을 떠나 10년을 연락하지 않고 살았지 않았나. 사연이 있었지만 해준의 엄마나 해준의 이모도 해준을 돌보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드라마뿐 아니라 당장 우리 주변을 돌아봐도 생전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삼촌이나 고모나 형제나 혹은 부모가 있다는 사람들을 한 다리만 건너도 만날 수 있다고.

그렇기에 ‘조립식 가족’이 그려내는 이 가족이 무척이나 애틋하다. 엄마 없이 자란 셋이 붙어 다닌다며 주원과 산하, 해준을 보고 “기구하다”며 안쓰럽게 연기는 동네 사람들에게 “저희 하나도 안 기구한데요? 각자 나름 스페셜한 거지!”라고 받아치는 주원이가 사랑스럽다. 커서 주원 아빠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항상 해준에게 당부하는 해준 이모 강이현(민지아)에게 윤정재가 하는 말엔 눈물이 다 난다. “잘할 필요 없어. 세상에 키운 값 갚으라는 부모가 어디 있어?”

특히 ‘조립식 가족’에서 윤정재는 이 애틋한 가족의 탄생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리 천성이 좋은 사람, 심성이 따스한 사람이라 해도 남의 자식들을 진짜 자기 자식으로 키우기란 어려운 일 아닌가. 하물며 입양아나 재혼으로 인해 생긴 자녀에게도 수 틀리면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란 말을 해대는 세상에서. 11화에서 자신을 키워준 아빠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었던 해준이 그간 모은 돈 8억 원이 든 통장을 내밀자 정재는 불같이 화를 낸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키워줘? 키우는 거지! 잘 먹고 잘 자고 재밌게 살고 그러라고 키우는 거지, 돈 내놓으라고 키우는 거야? 갚으라고 키우는 거냐고!” 진짜 핏줄로 이어진 부모자식도 돈 앞에서 으르렁거리거나 연을 끊는 일이 허다한 세상에서, 이런 정재를 더러 누가 부모가 아니라고 말하랴. 

투닥투닥거리면서도 자신의 상처는 상대에게 아픔이 될까 숨기려 하고, 반대로 상대의 상처는 어떻게든 공유하고 달래려 하는 주원-산하-해준의 모습은 또 얼마나 짠하고 애틋한지.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안고 자란 산하가, 해준의 엄마가 사연이 있어 해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곤 찾아가 ‘엄마가 버리지 않았음을 꼭 해준이 알게 해달라’며 부탁하는 모습을 보며 서로를 보듬는 형제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것인가 말이다.

‘조립식 가족’은 후반부에 20대에 10년간 떨어져 살았다가 다시 만난 주원과 산하의 로맨스에도 상당부분 분량을 할애하는 모양새인데, 사실 나는 이들의 로맨스엔 큰 관심이 가지 않는다. 결말로 갈수록 윤정재와 해준의 엄마 강서현을 엮으려고 하는 분위기인데, 그것도 썩 마뜩찮다. 사랑과 법적 관계로 진짜 가족을 만들려는 한국식 해피엔딩이 익숙하긴 한데, 그보다는 주원과 산하의 연애 소식에 진짜 가족이 아닌 자신은 소외될 거라며 상처받는 해준의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오고, 오랜 시간 자녀들을 위해 함께 돈을 모아온 윤정재와 김대욱의 케미가 더 부부처럼 느껴지거든.

‘조립식 가족’은 11월 27일, 15, 16회가 방영되며 종영할 예정이다. 판타지로 여겨질 만큼 세상 다정한 아빠 윤정재를 연기한 최원영에 박수를 보낸다. 교복 입은 고등학생부터 20대 후반 청년까지 여유롭게 소화한 김산하 역의 황인엽과 무해한 웃음과 짠한 눈물을 동시에 소화하는 댕댕미 매력을 선보인 강해준 역의 배현성, 이제는 어엿한 배우로 손색이 없어 보이는 윤주원 역의 정채원 등 청춘 배우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결말과는 별개로 이 드라마가 보여준 진정한 가족,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보며 울고 웃으면서 무척 즐거웠다고 전하고 싶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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