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회 농심백산수배 세계바둑시니어최강전 3국이 열렸던 지난 5일. 대국 해설을 맡았던 목진석 9단은 해설 도중 “전설들이 존중을 받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며 두 사람을 언급했다.
한 사람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바둑 기보를 공부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일본의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자신이 해설하던 3국에 출전한 중국의 루이나이웨이 9단(62)이었다.
‘반상의 철녀’, ‘바둑 여제’. 루이나이웨이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별명들이다. 무엇보다 그는 여자의 몸으로 중국은 물론 한국 바둑에도 굵직한 업적을 남긴 ‘전설 중의 전설’이다.
지난 7일 중국 칭다오 농심공장에서 만난 루이나이웨이는 “여기 오니 너무 기쁘다. 같은 시대 활동했던 기사들도 많이 있는데다, 내가 평소 존경하는 선생님들도 계시다. 백산수배를 핑계 삼아 같이 바둑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좋다”며 활짝 웃었다.
현대 일본 바둑의 창시자이자, 신포석과 화점 발견으로 바둑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던 우칭위안 9단의 제자이기도 한 루이나이웨이는 우칭위안과 함께 세고에 겐사쿠 9단 밑에서 사사했던 조훈현 9단의 사숙(스승의 사제)이기도 하다.
루이나이웨이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남편인 장주주 9단이 1989년 천안문 6.4 항쟁에 참가했다 수배령이 떨어져 미국과 일본에서 떠돌이 생활을 오랜 시간 했다. 그러다 조훈현 등 한국 기사들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건너왔고, 1999년 한국기원 소속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2011년 중국 정부가 특별 사면을 결정하면서 중국으로 돌아갔고, 지금은 중국기원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국인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끝날 수도 있었던 자신의 바둑 인생을 계속 이어가게 해준 한국은 그에겐 ‘제2의 고향’이다. 루이나이웨이는 “한국에는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자주 왔다갔다 했다가 코로나19가 유행했을 때는 잠시 못 갔다. 그러다 다시 지난해부터 한국을 찾고 있다”며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백산수배 같은 대회에도 불러주는 것이 그저 감사하다”고 말했다.

10년이 조금 넘는 한국에서의 생활. 이 짧은 기간 루이나이웨이가 한국 바둑에 남긴 업적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특히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남자 기사들을 꺾고 우승하는 장면을 여러번 연출해 충격을 줬다. 특히 2000년 국수전 예선에서 유창혁 9단, 도전자 결정전에서 당시 전성기를 달리던 이창호 9단을 꺾은 뒤 결승에서 사숙지간인 조훈현 9단마저 제압하고 우승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2004년 맥심커피배에서는 유창혁을 또 꺾고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바둑 기사로 최전성기를 보내야 했을 20대~30대 중반을 온통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허비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다만, 루이나이웨이는 이 때를 회상하면서도 “그저 운이 좋았다”며 겸손함을 보였다. “당대 최고수들을 꺾고 우승한 것은 그저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하지만 조훈현을 상대로 4승8패, 유창혁과 4승9패로 비교적 선전했고, 역대 최강의 기사로 꼽히는 이창호를 상대로는 6승5패로 앞서는 것은 루이나이웨이의 기재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뜻한다.
루이나이웨이가 한국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현 세계 최강자 신진서 9단을 언급할 때 다시 한 번 드러났다. 신진서는 최근 인터뷰에서 중국의 넓은 인재풀을 부러워하곤 했는데, 이에 대해 루이나이웨이는 “중국은 땅도 크고 사람도 많지 않나.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한국보다 많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며 “하지만 바둑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1인자다. 이창호가 농심신라면배에서 펼쳤던 활약이 이를 잘 보여주는데, 신진서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과거와 비교하면 나이 60이 넘은 지금은 확실히 기력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많은 바둑 기사들이 여전히 루이나이웨이를 존경하는 이유는, 바둑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 때문이다. AI로 인해 바둑의 많은 것들이 바뀐 지금, 그는 젊은 기사들처럼 AI(인공지능)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공부하고 있다. 루이나이웨이는 “AI가 등장하면서 기사들의 성장속도가 엄청 빨라졌다. 물론 바둑은 사람이 두는 것이다보니 결국 센 사람이 이기지만, 전체적인 포석이나 여러가지 상황에서 대처하는 법 등 배울게 많다”고 말했다.
루이나이웨이가 지금까지도 바둑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이유는 그저 바둑이 좋기 때문이다. 루이나이웨이는 “그저 이렇게 바둑을 열심히 하는게 행복하다. 모두와 같이 대국하고, 대국이 끝나면 다 같이 검토를 하면서 연구를 하는 것이 너무 좋다. 이런 것에서 원동력, 그리고 에너지가 생긴다”며 미소를 지었다. 요즘 활약하는 젊은 기사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자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