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없는 시간
꽃, 피울 저만치
잎에서 입으로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너머로
무슨 말인들 가능하다
장미에서 국화까지
탄생석에서 별똥별까지
이별이 이 별에서의 당신을 떠올리게 한다
기다려줘요, 속절없는 속삭임
연기한 봄날도 봄날이었다
입안을 맴도는 다음의 다짐, 갚지 못한 빈말을 조문한다
회환과 근조 화환이 동석한 자리
지척에서 엿듣는 당신의 기척
피기 전에 시든 꽃도 꽃이에요, 우기며
가슴 속에 들러붙은 압류 딱지 같은 약속 불이행을 떼어낸다
다음에 잘할게요
다음은 지금의 기일이 되고
속도 없고 속 아닌 것도 없는 부녀지간의 연기한 봄날은
아무렇지 않게 오고 가고
◇박봉희= 시집『복숭아꽃에도 복숭아꽃이 보이고』, 테마시선『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세요』.
<해설> 슬픈 詩인 걸 모르다가, 짐작 못하다가 다 읽고 나니, 마지막에 울컥 슬퍼지는 이 경우는 또 뭔가? “다음은 지금의 기일이 되고/속도 없고 속 아닌 것도 없는 부녀지간의 연기한 봄날은/ 아무렇지 않게 오고 가고 일단 “다음에 잘할게요”라는 제목이 신선하다. 현재는 잘은 못하지만, 왠지 다음에 잘할게요! 라고 하면 모든 게 다 용서될 것도 같다. 문장을 유연하게 끌고 가면서 그때그때 박아넣는 장면들을 어찌 이리 물 흐르듯 흘러가다가 어느 선착장에 승객인 나를 내려놓는 건지, 탁월한 문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없는 시간 이란 전제가 다음은 지금의 기일이 되고로 이어지면서 “장미에서 국화까지/탄생석에서 별똥별까지/이별이 이 별에서의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기막히게 언술이 발랄해서 더 슬픈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