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미나 극장에 앉아

2025-12-02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있는 타오르미나 극장을 최근에 다녀왔다. 기원전 3세기에 이 지역을 다스렸던 그리스인들이 세운 극장이라 그레코 극장이라 부르지만 이후 로마식 증축이 이어져 그레코로만 스타일이 혼재하는 흔치 않은 유적이다.

가톨릭 신자가 바티칸을 찾듯 연극쟁이들의 성소는 고대의 극장이다. 비록 그 극장을 목적으로 삼은 여행은 아니었지만 우연히 지역이 겹쳐, 나는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 그 성소를 찾았다.

절벽 위에 우뚝 선 야외극장. 산토리니의 티라 지역처럼 섬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극장은 외부 침입에 대비해 높은 곳에 자리 잡곤 한다. 타오르미나 극장도 그랬다. 에트나 화산을 배경으로 발아래에 이오니아 해안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객석에서는 절벽 위에 있다는 아찔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자체가 음향판인 거대한 반원형의 객석이 관객을 품어주고, 절벽과 객석 사이의 무대가 부드럽게 완충지대를 만들어준다. 하늘 바로 아래의 객석에서 무대를 보자니 연극의 진짜 주인이 관객이라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무대는 제단처럼 올려다보는 곳이 아니라 내려다보는 곳이었다!

마침 누군가 피리를 불었다. 수천석이 되는 넓은 객석이었지만 가냘픈 피리 소리가 바람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고스란히 들려, 음향이 좋은 극장이라는 소문을 입증시켜 주었다. 오래된 돌계단의 객석에 앉아 무대와 그 너머의 자연을 보면서 피리 소리를 듣자니 과거와 현재가, 자연과 예술이 그리고 인간까지 하나로 합쳐지는 듯 혹은 모두가 텅 비는 듯했다. 이런 것이 무상일까.

돌아오니 계엄 1년의 혼란스러운 현실이 기다린다. 여행은 그 자체도 좋지만 돌아갈 집이 있을 때 더 좋은 법이다. 이제 아수라장 같은 혼란 속에서 묵묵히 연극을 만드는 동료들 곁으로, 이 시절을 함께 견디는 관객에게로 돌아가자. 그들이 나의 집이다.

김명화 극작가·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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