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인생] 농작물 수분 첨병 역할 ‘벌’ 살리는 명의…“후학 양성에 힘보탤 것”

2025-01-07

작은 몸을 바삐 움직이며 이리저리 꿀을 따러 다니는 꿀벌들. 이같은 활동은 자신의 배를 불릴 뿐 아니라 인류 생존에도 기여하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세계 식량 대부분을 차지하는 100대 농작물 중 70% 이상이 꿀벌 수분을 통해 생산된다. 하지만 이유 모를 원인으로 꿀벌이 집단 폐사하고 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며 우려가 커지고 있다. 꿀벌을 살리기 위해 국내 1호 꿀벌 수의사가 된 정년기 꿀벌동물병원 원장(73)을 만났다.

정 원장을 만난 곳은 충북 옥천의 한 양봉농원. 주말이지만 그는 대전에서 이곳으로 출장 진료를 왔다. 정 원장은 맨몸으로 벌통을 열며 “이제는 꿀벌이 가족 같아 벌에 안 쏘이는 법도 알게 됐다”며 “쏘인다고 해도 약침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농담을 던졌다.

1974년 전남대학교 수의학과를 졸업한 그는 사료 회사, 동물 약품 회사를 거쳐 수의직 공무원으로 일해왔다. 대전보건환경연구원 동물위생시험소에서 가축 질병 업무를 맡은 정 원장은 1992년 처음 벌을 만났다. 질병 의심 소견이 있는 벌이나 집단 폐사 사례가 있는 양봉농가를 찾아 다니면서 꿀벌 치료법을 연구했다.

“당시엔 정해진 꿀벌 치료법이 없었어요. 같은 병증을 보여도 양봉농가마다 다른 약을 쓰더라고요. 꿀벌 질병에 관해 연구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국내엔 관련 내용을 다룬 책자도 전무하던 그 시절, 정 원장은 무작정 양봉농가를 찾아 꿀벌에 대해 알려달라고 부탁하며 회사 뒤편 동산에서 직접 벌을 쳤다. 꿀벌과 관련된 해외 학회를 다니며 ‘꿀벌 수의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2013년 공무원을 퇴직한 이후 대전에 ‘꿀벌동물병원’을 열었다. 그해 수의사 처방이 있어야만 동물의약품을 살 수 있는 ‘수의사 처방제’가 도입돼 꿀벌에게도 법적으로 수의사가 필요해졌다. 하지만 꿀벌 수의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양봉농가로 진료하러 가도 이미 수십년간 자신의 방식대로 꿀벌을 돌봐온 농민들은 제 말을 듣지 않더군요. 아내도 별일을 다 한다면서 어처구니 없어 하며 웃었습니다.”

그러나 정 원장이 처방한 대로 약을 사용하고 꿀벌을 돌보자 양봉농가에선 벌을 키우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처음엔 반감이 심하던 농가에서도 점차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2017년 한국양봉농협에서 2호 수의사가 탄생하기 전까지 그는 국내 유일의 꿀벌 수의사였다.

정 원장은 요즘 같은 겨울엔 벌통에 청진기를 대보고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해 벌들의 활동을 관찰한다. 그에 따르면 꿀벌 질환은 벌통 전체를 하나의 개체로 보고 접근해야 한단다. 꿀벌은 벌통 전체를 구성하는 세포인 셈이다. 지난해 봄에는 정 원장 덕분에 벌을 지킨 일도 있었다. 한 양봉농가에서 키우던 벌들이 폐사했는데, 그가 정밀 조사한 덕분에 사과 적과제가 원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사과농가에 적과제를 쓰지 말아주길 요청했고, 농업기술센터에도 건의해 벌들이 더 많이 죽지 않도록 막았다.

그는 앞으로도 꿀벌 생태를 살피며 벌 돌보기에 힘쓸 계획이다. 꿀벌 수의사를 양성하는 책도 출판할 예정이다.

“그동안 해외 자료를 통해 공부한 것, 현장을 다니며 보고 배운 것을 정리해 ‘꿀벌질병학’이란 책을 곧 내려고 해요. 수의학과 학생과 수의사들이 이 책으로 공부해 전문 지식을 갖춘 꿀벌 수의사들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옥천=황지원 기자 support@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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