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조(징계사유) 제9항 : 자연스러운 만남이 아닌 이성 간 교제(작업)만을 위해 모임에 참석하는 회원은 경고, 활동정지, 강제탈퇴 처분이 가능하다.’
프리다이빙 강사인 황인찬씨(49·가명)는 1975년생부터 1985년생까지 가입할 수 있는 ○○산악회의 매니저를 맡고 있다. 이곳엔 체계적인 운영규칙이 존재한다. 이성 교제만을 목적으로 들어오는 이를 제재하거나, 비밀리에 산행 가는 것을 금지하며, 술에 취해 욕설·폭력 등 피해를 주는 회원에겐 징계를 가한다. 20년 가까이 운영된 산악회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고, 회칙도 개정에 개정을 거듭했다.
황씨는 “얼마 전엔 산행 끝나고 두 명이 노래방에 갔다가 남자가 여자에게 입맞춤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해 강퇴 처리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조심스러운 문화가 만들어진 편인데도 불미스러운 일은 꼭 생겨요. 혈기왕성한 사람들끼리 산행을 하다 보면 가까이서 숨소리도 듣게 되고,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일은 종종 있죠. 회원끼리 싸움이 발생했는데 어느 한쪽이 옳다고 하기 애매해서 골치 아픈 일도 생기고요. 여기뿐 아니라 어디든 그럴 거예요.”
이른바 ‘취향 공동체’의 시대다. 젊은층부터 중장년·노년층까지 러닝, 테니스, 등산 등 각종 ‘크루(crew)’가 인기를 끌고 있다. 크루는 동호회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더 자유롭고 유연한 형태의 모임이다. 느슨한 연결을 추구하는 MZ세대에게 ‘힙한 문화’로 호응을 얻으며 트렌드가 됐다. 운동뿐 아니라 독서나 와인, 캠핑, 노래, 반려동물 등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이들을 연결해주는 플랫폼도 다수 생겼다.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1000명 넘는 사람들이 취향을 매개로 모여든다. 사람이 모이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를 교훈 삼아 크고 작은 규칙이 만들어지곤 한다.
경향신문은 크루 30곳의 운영규칙·회칙을 들여다보고 이 중 7곳의 운영진 또는 참석자를 인터뷰했다. 엄격함과 체계성의 정도는 저마다 달랐으나 이성 교제와 관련한 규칙은 공통으로 존재했다. ‘이성에게 불쾌감 주는 행동 금지’와 같이 정제된 표현이 있는가 하면 ‘여미새·남미새(이성에 과한 관심을 드러내는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 강퇴’처럼 노골적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다. ‘사조직 금지’나 ‘전도 금지’ ‘상업·영리행위 금지’ 등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다소 비장하고도 의미심장한 각종 규칙에는 ‘작은 사회’ 크루에서 일어나는 웃지 못할 천태만상과 운영진의 고충, 자정 노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연애는 나가서 해주시면 안될까요ㅠㅠ”
“남녀가 사귀면 둘 다 나가는 게 원칙이었어요. 커플인 상태로 크루에 들어오는 건 괜찮지만요.”
직장인 안준용씨(36·가명)가 지난여름 참여했던 러닝크루에는 ‘연애 금지’ 규칙이 있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기준 90명가량 모인 크루에는 사귀고 헤어지는 커플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모임의 본목적이 흐려진다는 우려가 생기자 특단의 대책이 나온 것이었다. 안씨는 “요즘 러닝크루는 달리기하는 곳이 아니라 연애하러 가는 곳이란 인식이 많다”면서 “일종의 ‘소개팅 플랫폼’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 지역에서 러닝크루를 이끌고 있는 이민호씨(36·가명)도 비슷한 걱정을 했다. 그는 “연애를 금지한다는 등의 명시적인 금지 규칙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이성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면 운영진이 중간에 끼어들거나 제재를 한다”고 말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저희 눈에 보이거든요. 얼마 전에는 다수의 여성에게 한꺼번에 개인 메시지를 보낸 남성에게 주의를 준 적도 있어요.”
중장년이 주로 참여하는 산악회는 ‘불륜의 성지’라는 오명에 시달려왔다. 포털사이트에 ‘산악회’를 검색하면 이혼·상간 소송 절차를 요약한 법무법인의 홍보 게시물이 줄줄이 나온다. 오랜 기간의 운영 노하우가 쌓인 데다 외부의 곱지 않은 시선이 더해져 산악회의 운영규칙·회칙은 엄격하고 구체적인 편이다.
박수진씨(56)가 10년 가까이 활동한 산악회에는 ‘연락처 교환’이 암묵적으로 금지된다. 활동 기반인 네이버 카페에 특정 산행을 주도하는 ‘산행대장’만 연락처를 올릴 뿐이다. 박씨는 “처음 산악회를 찾을 때만 해도 어디가 건전한 모임인지 알 수 없어서 걱정이 많았다”면서 “여기는 괜찮은 곳이라는 지인의 소개를 받고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조직 금지’ ‘전도 금지’ ‘상업행위 금지’ 등 모임의 존속을 위한 규칙은 다양하다. 특히 구성원들을 다른 모임으로 빼가는 ‘크루사냥꾼’ 때문에 소수의 비공식적인 모임은 제한하는 곳이 많다. 임성태씨(37)가 참여했던 테니스클럽도 그랬다.
“한번은 몇몇 사람들끼리만 ‘이너서클’을 만든 걸 알게 된 적도 있어요. 본인들만 친하게 지내더니 테니스코트마저 따로 대관하기 시작한 거죠. 이 모임의 가장 큰 장점은 ‘예약 시스템’이었거든요. 모임장이 오랜 시간 고민해서 체계를 만들고 구성원들에게 노하우도 교육해줬어요. 이득이 되는 점만 누리면서 입맛에 맞는 사람들끼리 별개의 모임을 꾸린 거죠.”
임씨는 “이너서클 사건 이후 관련된 사람들과는 안 좋게 결별하게 됐다”면서 “테니스클럽은 그로부터 1년 정도 유지되다 올해 초 해체됐다”고 말했다.
■온갖 갈등 해결 요구 “우린 법원이 아니에요!”
엄격한 규칙을 두는 데는 딜레마도 있다. 한의사로 일하며 5년째 러닝크루를 운영하는 김기현씨(38)는 “(전용 웹 기준) 회원이 1000명 넘지만 무언가를 금지하는 규칙을 만들진 않았다”고 말했다.
“크루는 학교나 회사와는 다르게 다 큰 성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취미 모임이잖아요. 무작정 네거티브 규제(금지 조항)를 두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갈등이 생겼는데) ‘알아서 하라’고 놔둘 수도 없고…. 난감할 때가 참 많죠.”
김씨는 “성 문제 외에도 초상권 갈등이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는 때도 있다”고 했다. 그는 “4~5개월 전쯤에는 크루 사진을 유출해 다른 모임인 것처럼 홍보하는 사람이 발각돼 사과를 받았다”며 “운영진은 수사·사법기관이 아니다 보니 조사나 수사를 할 수도 없어 에너지가 많이 든다”고 말했다.
황인찬씨도 “분쟁이 생겼는데 양쪽 입장이 첨예하게 갈릴 때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술자리에서 폭행이 일어났으면 누가 어떻게 잘못을 했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운영진의 본역할이 판단하고 징계 내리는 게 아니거든요. ‘여러분, 저는 검사나 판사가 아니에요!’ 이런 말을 많이 하게 돼요.”
갈등관리를 위한 회의체를 따로 두는 곳도 있었다. 박수진씨의 산악회에는 ‘윤리위원회’가 있다. 박씨는 “산행을 하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매니저에게 신고하도록 하고, 5명 정도로 구성되는 윤리위를 꾸려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한다”면서 “윤리위에서는 신고한 당사자뿐 아니라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수 있는 증인들의 이야기도 듣는다”고 설명했다.
이혼·가사법 전문인 한승미 변호사(법무법인 승원)는 “불륜이 발각돼 (크루에서) 쫓겨났다는 등 자전거 동호회나 산악회에서 중년 간에 감정이 싹터서 문제가 되는 사건을 적지 않게 처리한다”면서 “배우자 측이 외도 당사자에게 상간 소송을 거는 경우 운영진에게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았냐’며 법정 진술을 요구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수년, 수십년 후에도 추억할 수 있는 곳 되길”
규칙·회칙을 두는 것 외에도 크루의 존속을 위한 운영진의 노력은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김기현씨는 ‘분위기’와 ‘문화’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러닝 후에는 물만 먹고 헤어지는 분위기를 만드는 거예요. 술자리는 적어도 10㎞, 30㎞ 장거리 러닝을 한 날에만 기념하는 정도로 만드는 식으로요.”
회원의 나이와 성별을 단일하게 정해놓거나 가입 문턱을 높이기도 한다. 민보라씨(39)가 운영하는 산악회는 1984년생부터 1995년생 여성만 들어올 수 있다. 민씨는 “혼성 모임일 때 생기는 문제도 있지만 기혼 여성과 미혼 여성이 함께 있을 때 육아, 결혼 등 관심사에 따라 그룹이 나뉠 것을 걱정했다”면서 “3~4년 운영하면서 크게 골머리를 앓은 일이 없었고 산행에 충실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한 고군분투도 있다. 러닝크루의 경우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행인의 통행을 방해하거나 소음을 유발하는 등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지적이 다수 제기됐다. 이민호씨의 러닝크루는 최근 이러한 비판을 고려해 시민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한 줄 러닝’을 하고 있다. 어쩌다 행인들과 동선이 겹치게 되면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며 지나간다고도 했다. 이씨는 “러닝크루를 안 좋게 보는 시선이 신경 쓰이는 게 사실”이라며 “인식 개선을 위해 전부터 하던 연탄 나눔 횟수를 늘리고 플로깅(쓰레기를 주우며 조깅)도 자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루 운영진은 여러 고충을 털어놓으면서도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꾸준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1년, 2년, 3년 시간이 흐를수록 그때마다 느끼는 성취감과 만족도가 매번 달라요. 사람들이 언제든 편하게 찾아올 수 있고, 가족 단위도 와서 뛰는 크루가 되길 바라고 있어요.”(김기현씨)
“제가 70살이 되고, 80살이 돼도 산악회가 계속 유지되는 게 소망이에요. 산행하면서 건강도 챙기고요.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곳이 추억할 수 있는 곳으로 남아 있어주면 좋겠어요.”(황인찬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