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고와 로또
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걸 찾아내기를 좋아한다. 무리수 루트 2를 있는 그대로 쓰기보다 왜 루트 2라는 수가 정의되어야 하는지, 그래서 허수의 세계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 헤매다가 가끔 우주 끝을 확인했다는 환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런 데 평생을 바친 자들의 정신세계를 가늠할 수 없어 그 웅장함에 끝없는 질투와 끝없는 존경심을 갖는다.
한때 빙고 게임 장면을 녹화해 유튜브 방송을 해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결정적인 어떤 한 장면을 낚기 위해 몰두했다. 5행 5열에서 한가운데 한 점을 주고 시작하니 네 개의 숫자를 제시했을 때 바로 빙고를 외칠 수 있다거나, 반대로 숫자가 꽉 찼는데도 결정적 하나가 모자라 한 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게임이 끝났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한 점도 찍지 못했다거나 하는 특별한 어떤 장면을 잡아내려 했다.
네 개의 숫자만으로 빙고가 된 적도 있다. 그런데 가득 채웠는데도 하나가 안 떠서 완성하지 못할 때는 더 잦았다. 네 개의 숫자만으로 빙고를 완성한 때처럼 낮은 확률로 한 점도 찍지 못한 때도 있다. 고작 75개의 숫자로 24개짜리 칸을 채우면서 빙고를 완성하는 경우의 수는 대체 얼마인가. 게임이 끝날 때마다 갖가지 경우에 삶의 수많은 실패와 수많은 안도의 순간들이 겹쳤다.
눈과 손가락은 기계적으로 숫자를 보고 마우스 버튼을 누르지만, 머릿속은 숨이 막힐 정도로 복잡해져서 더 이상 빙고 게임을 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 손으로 그려서 확률을 염두에 두고 눈치를 봐가며 입으로 외치는 빙고에 비해 눈과 손가락으로만 하면서 보너스 게임과 아이템에 의지해야 하는 빙고는 수동적이어서 불쾌하다.
나는 로또가 처음 생겼던 때를 기억한다. 월드컵 경기를 보려 촬영을 중단하고 모든 스태프가 밥을 먹으러 가서 응원했던 그해 겨울이다. 16강이었던가, 이탈리아전에서 이겼던 경기로 기억하는데, 마지막 골을 넣고 다들 난리가 났을 때 “예!”라고 외치면서 젓가락을 쥔 팔을 있는 힘껏 내뻗었다가 팔꿈치에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지금도 가끔 아프다.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신호에 걸릴 때마다 로또 용지를 들고 주위에 보이는 숫자들을 칠했다. 신문에서는 어느 노인이 2000만 원인가 얼마였던가 전세금을 다 빼서 그 돈으로 모두 로또를 구매했는데 당첨되지 않아서 무슨 보상을 받았다던가, 이후로 구매 횟수를 제한했다던가, 또 누구는 용지에 표기만 하고 구매하지 않았다가 생떼를 써서 2000만 원을 받았다던가, 누구는 100억을 받았다던가, 그리고 어느 때부터 조작이 의심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던가. 난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싫었다. 그따위 요행에 얼마 되지도 않는 가진 전부를 걸고 생떼를 부리는 그 ‘꼬라지’들이 너무 싫었다.
2005년이었던가 2006년이었던가, 강원도 삼척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갔던 때다. 작년에 세상을 뜬 유 감독과 연출부들이 함께 갔는데, 영화 투자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모두가 로또 열풍에 휩싸였다. 나도 종이에 표기했다. 내 생일이 1월 19일. 그래서 수열로 1월을 1, 2, 4, 8, 19일을 19, 38로 썼다. 그때 시나리오를 내가 썼고, 정리하느라고 사러 나갈 시점을 놓쳤다. 그리고 방송을 모두 함께 보는데 멍-했다. 그 번호가 당첨됐던 거다, 1등으로. 얼마였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요즘 십억, 이십억 하는 금액보다는 훨씬 컸다.
난 우연을 믿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요행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를 쓰고 매달려야 겨우 갈증을 채울 정도였다. 민숭민숭한 뇌가 가락국수가 되고 소면이 될 만큼 치열하게 기를 쓰고 갈아 넣어야 겨우 공짜로 주는 서비스 정도의 보상을 받는다.
단순한 빙고는 내 머리를 너무 복잡하게 해서 더 이상 하지 않고, 로또는 살기 위해 악다구니로 버둥거리며 버텨야만 겨우 숨을 돌릴 수 있는 내 삶에서 그 단순한 숫자놀이는 내 세계와 다른 세계의 것이기 때문에 가까이하지 않는다. 되도록 멀리, 멀리. 그리고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야망도 없다. 영화로 크게 성공하겠다는 꿈도 아주 짧게만 꿨다. 돈 모을 생각도 없고 오롯이 나 자신만을 위해 물질을 쟁취하려는 욕망도 거세한 지 오래다. 그냥 적당히 그때, 그때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기로 했다.
안다. 지능은 높은 편인데 게을러터져서 아주 작은 요행이라도 선물 받을 수 없을 만큼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고지식한 성격 때문에 요행이 어울리지 않는 삶이란 것을.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 스스로에게 ‘쪽팔리지’ 않을 만큼 정직하고 우직할 도리밖에 없다. 이젠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의심받고 오해받아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이 먹어서 좋은 점이 이런 것밖에 없다니. 쯧.
결과보고서
영화 <(가제)반구대 사피엔스>의 사업 기간이 11월 30일부로 종료되고 12월 2일에 내년에 촬영할 수 있을지 이대로 엎어질지 결정이 난다. 이 지원사업은 여느 평가처럼 70점 이상을 받으면 무사히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90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내 능력 여하에 따라 100명의 배우와 스태프 크레딧이 결정된다. 그래서 결과보고서를 열심히 썼다.
작성한 문서 쪽수만 218쪽이고, 영상은 41개에 총 러닝타임 53분 2초, OST 데모 28곡에 총 러닝타임 1시간 33분 25초, 사용한 이미지 773컷. 애썼다. 조금만 더 손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양에 차도록 더 노력하지 않았음의 불편한 마음을 시간제한에 빌붙었다.
다큐멘터리도 다른 아홉 팀과 다르게 미친 짓을 하는 중인 것만 같은데 극영화까지, 아…… 솔직히 정말 지친다.
화가 날 때도 많았다. 시작할 땐 분명히 역할 분담이 있었는데, 기획자이자 연출자가 기획과 연출에 집중하지 못할 만큼 서류만 만지고 있고 온갖 허드렛일까지 다 맡아 하고 있다는 게 정말 화가 났다. 다들 지원금을 받으면 적당히 잘 먹고 잘 지내며 잘 마무리한다는데 나는 지원금이 나올 때마다 그만큼 또는 그 이상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지원사업에 관련된 일의 모든 것, 정말 ‘모든’ 것에 (최소한 지금까지는) 통달하게 됐다. 몇 년간의 시간과 몇 겹의 경험치를 꾹꾹 접어 내 걸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그 정신 사납다는 e나라도움 활용도 난 무척 빠르게 익숙해졌다. 학교에서 NCS 과목을 전담하면서 이런 시스템에 익숙해진 덕도 있고, 내 뇌 구조가 입력과 출력이 분명한 기제에 잘 적응한다는 덕도 있으며, 숫자에 밝은 덕도 있다. 지원사업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빚을 지게 될 것이지만 업무에서는 무적이 됐다. (최소한 현재로서는) 지원사업의 어떤 것에도 두려움이 없다. 단 8개월 만에. 그래서 날 화나게 하거나 실망하게 했던 사람과 상황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까짓것, 돈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이제 다큐멘터리 시사용 편집 시작!
아, 내게 지원사업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가 큰 장점이 있다. 책임감. 혼자 하면 게으름에 빠져 용두사미로 끝날 일을, 받았으니 뱉어내야 한다는 강박증이 나를 갈아낼지언정 마무리 짓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뭐가 됐든 고-오-맙-다!
목이 아플 때와 허리가 아플 때의 차이
거참,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논문을 쓸 땐 허리가 너무 아팠다. 그런데 결과보고서를 쓸 땐 목덜미가 너무 아팠다. 둘 다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는 일이었는데 왜 아픈 부위가 극명하게 차이 나는지 모르겠다. 넘겨짚자면 활자만 보는 것과 이미지를 보는 것의 차이이고, 이미지를 볼 때면 습관적으로 목이 앞으로 빠져서 그런 건가…….
아버지 전시회 도록을 만들기 위해 작품을 촬영하느라 촬영감독과 편집감독이 함께 수고해 줬다. 그날 내 부모님은 두 감독에게 수고했다고 저녁으로 장어를 쐈는데, 편집감독이 샐러드바에 가서 이것저것 챙겨오느라 바쁠 때 엄마가 유심히 보더니 귓속말로 이렇게 물었다. “편집감독은 왜 목이 없니?”
이민정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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