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예술로…디지털이 질투할 공간

2024-10-04

‘슈타이들 북 컬처-매직 온 페이퍼’ 전시

“나의 신념은 완벽한 아날로그 책을 생산하는 것이다.” 종이책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출판계의 거장 게르하르드 슈타이들. 그가 창조한 완벽하게 아름다운 아트 북 500여 권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9월 14일부터 내년 2월 23일까지 서울 그라운드시소 서촌에서 열리는 ‘슈타이들 북 컬처-매직 온 페이퍼’ 전시다.

현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선구자 로버트 프랭크, 현존하는 팝 아트의 거장 짐 다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귄터 그라스, 샤넬과 펜디의 수장 칼 라거펠트, 에르메스와 롤스로이스를 기록한 독보적인 사진가 코토 볼로포…. 이들은 모두 세기를 빛낸 아티스트들이자 게르하르드 슈타이들(74)과 아트 북 작업을 한 아티스트들이다. 전 세계 사진가들이 “슈타이들과 함께 책을 제작하는 것은 아티스트의 커리어가 정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말하는 이유기도 하다.

1968년 시작, 4층 건물서 모든 공정 끝내

슈타이들은 청소년 시절, 카르티에 브레송 같은 젊은 스타 사진가들을 보면서 자신도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삼류사진가로 남고 싶지 않았던 그는 당시 엉성한 프린터 때문에 사진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열일곱 살 때부터 인쇄술을 배워 자신만의 예술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브레송 같은 유명 사진가는 되지 못했지만 그들이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아트 북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1968년 독일의 작은 시골마을 괴팅겐에서 시작된 출판사 슈타이들(Steidl)은 4층짜리 건물 한 지붕 아래서 출판에 관한 모든 공정이 이뤄진다. 4층 라이브러리에서 아티스트와 기획 아이디어를 짜고, 3층에선 레이아웃 디자인을 하고, 2층에선 사진 등 이미지 작업을 하고, 1층에선 인쇄를 한다. 이런 수직 공정이 56년간 지속돼온 슈타이들 출판사만의 방식이고 종이를 고르는 일부터 인쇄, 디자인, 교정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게르하르드 슈타이들의 손길이 빠지는 법이 없다.

‘완벽주의자들을 위한 완벽주의자’의 일상은 그래서 늘 기계처럼 완벽하게 단조롭다. 30년 채식주의자인 그는 손님이 찾아와도 외부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 전담 요리사가 매끼니 슈타이들의 식사를 차리는 동시에 책을 의논하러 온 아티스트까지 대접한다. 한국 사진가로는 처음으로 2017년 슈타이들과 함께 사진집 『DMZ 비무장지대』를 제작한 박종우 다큐멘터리 사진가에 따르면 출판사 건물 옆에는 게스트 하우스도 있다. 각 방마다 ‘라거펠트의 방’ ‘귄터 그라스의 방’ 등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전 세계에서 이곳을 방문한 아티스트들은 이 방들에 머물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슈타이들과 함께 먹고 함께 대화를 나누며 오로지 책만 생각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2019년 세상을 떠난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에 대한 추억이 남다른 그에게 짧은 에피소드를 묻자 “라거펠트는 자신의 첫 번째 직업은 사진작가, 두 번째는 출판업자, 세 번째가 패션 디자이너라고 할 만큼 아트 북을 만드는 데 진심이고 열심이었다”며 “우리는 언제나 아침 식사 때 지난밤 읽었던 책과 아침에 읽은 신문 이슈를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라거펠트는 자신의 역할이 ‘패션을 파는 게 아니라 패션으로 전달되는 공기를 파는 일’이라고 했다. 나의 역할은 우리 삶이 아날로그에서 멀어지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AI가 소설을 쓰고 사진을 조작할 순 있지만 작가의 의도까지 흉내 낼 수는 없다. 사진가 로버트 프래돌이 ‘디지털은 잊기 위함이고, 아날로그는 기억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종이책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매체고, 결국 내가 하는 작업은 다음 세대와의 계약이다.”

이번 전시는 이 고집쟁이 슈타이들의 책에 관한 역대 최대 규모로 2006년부터 2023년까지 출판된 책들 중 엄선한 500권을 만날 수 있다. 이중에는 앤디 워홀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한 ‘멀티플(Multiple)’ 24점이 포함돼 있는데, 제작기간만 14년이 걸린 데미안 허스트의 멀티플 ‘파머시 런던(Pharmacy London)’은 이번 전시가 세계 최초 공개다.

멀티플은 슈타이들이 아티스트와 함께 만드는 한정판 ‘책 예술품’이다. 1960년대에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조지 마키우나스가 골판지 상자 등에 여러 아티스트가 사전 제작한 오브제들을 채워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플럭스 박스(Flux Boxes)’를 만들었고, 슈타이들이 이 개념을 이어받아 ‘상자에 담긴 여러 권의 특별한 아트 북이자 오브제’ 컨셉트를 창조했다.

테세우스 찬, 한복 보고 현장서 새 작품

이번에 최초 공개되는 데미안 허스트의 ‘런던 파머시’는 총 10권의 책으로 구성돼 있고, 안에는 런던에 있는 4000개의 약국 외관을 비롯해 주인과 실내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담겨 있다. 각 권은 500페이지 분량으로 사용된 종이만 총 40t이다. 50개의 멀티플이 한정판으로 제작됐고, 개당 가격은 2500유로(약 366만원)다.

이 외에도 로버트 프랭크, 유르겐 텔러, 낸 골딘, 칼 라거펠트, 로니 혼 등 유명 사진가들의 사진집부터 샤넬, 펜디, 돔 페리뇽 등 브랜드들의 의뢰로 만들어진 ‘팩토리 북’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브랜드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버켄스탁의 멀티플 ‘오래된 공장은 죽지 않는다’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트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테세우스 찬, 짐 다인, 다야니타 싱 세 사람이 책으로 만든 설치예술작품도 만나 볼 수 있다. 이들은 슈타이들과 20년 이상 아트 북 작업을 함께해 온 아티스트로 전시 때마다 특별한 설치작업을 한다. 이번에도 방한해 직접 자신들의 공간을 꾸몄다. 특히 그래픽 아티스트 테세우스 찬은 서촌 일대를 산책하다가 한복을 입은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원래 계획했던 작품 대신 서울과 한복을 주제로 한 흥미로운 작품을 새로 그렸다.

3층 전시 공간 한쪽에는 슈타이들이 아티스트들과 함께 책을 만드는 과정을 담아낸 다큐멘터리와 인터뷰 영상을 상영하는 시네마 룸이 마련돼 있다. 전시장 4층에는 슈타이들 출판사 건물 4층에 있는 것과 똑같은 라이브러리가 재현됐다. 독일에서 한국까지 수백 권의 책을 실제로 옮겨왔다.

“햇살이 좋은 날, 공원이나 테라스에 앉아 잘 만들어진 책이나 신문을 읽는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이야말로 진정 럭셔리한 일이다. 종이의 질감, 냄새, 아름다운 폰트, 잘 인쇄된 색상과 이미지가 주는 즐거움 등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채워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성은 디지털이 아무리 발전해도 채워질 수 없다.”

‘슈타이들 북 컬처-매직 온 페이퍼’ 전시에선 바로 이 지적인 충만감을 듬뿍 느낄 수 있다. 슈타이들이 선별한 완벽한 종이를 직접 만지고, 종이 넘기는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슈타이들 책 특유의 잉크 향기까지 음미할 수 있다. 길을 걸을 때도, 위험천만하게 횡단보도를 지날 때도, 밥을 먹으면서도 손에서 떠나지 않는 휴대폰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감각 경험이다.

슈타이들의 장난기 가득한 미학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롭다. 한쪽 벽면에 수십 개의 Q자가 가득한데, 슈타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알파벳이라고 한다.

“긴 꼬리가 생명인 글자인데 그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마치 동양의 서예를 보듯 너무 아름답다. 더욱이 알파벳 중에서 E, S 등은 많이 쓰이지만 Q는 자주 쓰이는 글자가 아니어서 책이나 신문 등에서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Q를 찾는 일이 내게는 보물찾기와 같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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