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 마라톤의 역주행

2025-04-30

‘천만 러너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달리기를 즐긴다니, 이제 달리기는 단순한 붐을 넘어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아가는 모양이다. 이와 함께 달리기 대회도 성황이다. 인기 있는 마라톤 대회는 참가 신청 경쟁이 치열해 “아이돌 콘서트 티케팅을 방불케 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심지어 웃돈을 얹어 배번을 양도받는 일까지 벌어진다.

나도 달리기에 빠져 살다 보니 러닝 크루에도 들어가고, 마라톤 대회도 하나둘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3일, 드디어 인생 첫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그러던 중 좀 이상한 마라톤 대회에 대해 알게 됐다. ‘화성 효 마라톤’이다.

이 대회는 커플런의 경우엔 ‘남녀 커플’로, 가족런은 ‘3~5인의 가족’으로 참가 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대회 홈페이지에는 커플런에 대해 “남녀 혼성으로만 신청 가능”하고 “남남, 여여 신청은 취소처리된다”는 내용을 명시해 놓았다. 동성으로 구성된 2인 가족, 예를 들어 아빠와 아들, 이모와 여조카 같은 조합은 참가할 수 없는 셈이다.

‘화성 효 마라톤’은 전통적인 이성애 ‘정상가족’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런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유연하게 관계를 맺고 가족을 구성한다. 비혼, 동거, 한부모 가족, 동성 커플, 친구 공동체 등 그 형태도 다종다양하다. 법적으로 가족이 아니더라도, 함께 일상을 꾸리고 돌봄과 책임을 나누는 사람들과 공동체들이 존재한다. 그런 이들이 ‘남녀 커플이 아니라서’ 등의 이유로 마라톤에 참여할 수 없다니, 그건 부당할 뿐만 아니라 참 지루한 일이다.

나는 ‘효(孝)’란 말을 좋아한다. 이 말엔 우리가 점점 하찮게 여기게 된 돌봄과 책임, 유대와 감응 같은 소중한 가치들이 녹아 있다. 동시에, 애틋하면서도 귀찮고 버거운 감정까지 함께 담겨 있어 더 마음에 든다. 과거에 ‘효’란 가족을 이룬 다양한 세대가 서로 돌봄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공동체 구성 원리의 이름이었다. 그 의미를 살려서 단순히 부모에게 복종하는 도덕으로서가 아니라, 서로 돌보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윤리로서 효에 대해 생각할 때가 됐다. 나는 종종 도움을 준 친구나 사랑하는 이에게 “효도하겠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 밑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화성 효 마라톤’도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효’의 의미를 보다 확장해서 해석해보면 어떨까. 달리고 싶은 사람들이 각자의 신체적 조건이나 삶의 형편에 맞게 함께 달리기를 즐길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달라진 관계 맺음의 규칙, 태도, 실천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다시 말할 수 있는 ‘효’의 구성 요소임을 나누는 흥미로운 기회가 되지 않을까.

와중에 더 황당한 일은 대회 공동 주최기관인 ‘경인일보’가 편향적인 참가 기준을 비판하는 글을 검열하고 게재를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해당 글이 실릴 예정이었던 코너의 제목은 ‘문득 인권’이었다. 인권을 다루는 고정 코너에서조차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다니, 게재 거부의 사유가 참 궁색하다.

요즘 나는 ‘슬로 러닝’을 즐긴다. 여기서 ‘슬로’의 의미는 심박수가 120이 넘지 않도록 천천히 달린다는 의미지만, 달리는 습관과 달릴 수 있는 몸을 천천히 만들어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처럼 빨리 뛰기 어려운 사람에게 적절한 달리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달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긴 시간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함께 달리는 문화’가 자리 잡는 과정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5월3일에 참가하는 인생 첫 마라톤 대회는 ‘여성 마라톤’이다. “참가 제한이 없으며 누구나 참여 가능한 대회”다. 아쉽지만 올해 대회 신청은 이미 끝났다. 관심 있는 분은 내년을 노려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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