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록] 어디에서 해답을 찾을까

2024-10-24

지금으로부터 900년 전의 일입니다. 1123년 북송의 서긍(徐兢, 1091~1153)이라는 사람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습니다. 한 달가량 고려에서 시간을 보냈다는군요. 귀국 후 서긍은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보고서로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선화봉사고려도경>(이하 <고려도경>)입니다. 보고 들은 것을 적었으니, 보고서이자 견문록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고려도경>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신기해 보였나 봅니다.

고려 사람들은 병이 나서 아파도 약을 먹지 않고 오직 귀신을 섬길 줄만 알아 저주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본래 귀신을 섬겨 주문과 방술을 알 따름이다. 백성들이 재난이나 질병이 생기면 개경 북쪽에 있는 숭산신사(崧山神祠)에 가서 옷과 말을 바치고 기도한다.

<고려도경>의 기록은 고려사회에 무격신앙이 상당히 퍼져있음을 보여줍니다. 병이 잘 낫지 않으면 귀신이 든 것으로 여겨 사당에 가서 빌거나 귀신을 쫓기 위한 주문을 왼다는 것이지요.

얼마 뒤, 개경에 살던 고려의 문관인 이규보(1169-1241)도 이웃집에서 벌어지는 굿판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의 이웃에 무당집이 있었다는군요.

날마다 많은 남녀가 구름같이 모이고, 북・장구 등의 시끄러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당은 주름진 얼굴, 반백의 머리에 대략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들보에 닿을 듯이 동동 뛰는 중간중간에 새소리 같은 목소리로 늦을락 빠를락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예언이 신통하게 잘 맞는다고 하여 신도들이 손비빔을 하며 곡식과 옷감 등을 바쳤다. 타고 있는 두 자루의 촛불에 떡이며 고기, 과일로 질펀하게 차린 굿상 뒤 신당의 벽에는 무신도가 액자처럼 모셔져 있고, 신이 내려오는 길목인 신간(神竿)과 굿상 곁에는 굿을 차린 사람이 바친 재물이 수북이 쌓여 있다.’(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무당의 입김이 천하를 호령하다’, 현북스, 2022. 참조)

이규보의 설명이 매우 생생하여 마치 눈앞에서 굿판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이 말입니다.

손비빔을 하는 이에게는 어떤 걱정과 불안이 있는 것일까요? 집에 오랜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얼마 전 세상과 이별한 가족의 극락왕생을 비는 것일까요? 이도저도 아니면, 다른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겠지요.

‘들보에 닿을 듯이 동동 뛰는 중간중간에 새소리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이는 무격(무당)입니다. 지금은 무속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죠. 당시 사람들은 이들이 자신의 신과 소통하며, 이웃으로 가까이 있던 무격은 고려 후기가 되면 도성 밖으로 쫓겨납니다. 요망한 말로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이유였죠. 물론 성리학의 영향도 한몫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말입니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탄압에도 무격신앙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서민들은 잦은 자연재해와 전쟁, 권력자의 횡포, 배고프고 추운 나날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었죠. 정신적 윤리성이나 내세적 구원을 설파하는 유교와 불교는 너무나도 멀리 있었고, 고단한 일상은 늘 그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그러니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무격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지막에 만나는 위로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고통은 내(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는 여전히 걱정입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해답을 찾아야 할까요?

원영미 울산대학교 강사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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