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項羽)는 ‘해하(垓下) 전투’에서 유방(劉邦)에게 크게 패배한 후 계속 쫓기다가 우장(烏江) 강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사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그대로 창장(長江)을 건너기만 하면 항우의 근거지였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배에 올라 후일을 도모하라’는 주변의 조언을 따르는 대신, 장렬하게 싸우다가 자결하는 선택을 한다. 이미 전사한 병사들 부모를 뵐 낯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항우의 나이 30세를 갓 넘긴 무렵의 일이다.

당시 중국 땅 전체를 손에 넣었다가, 숙명의 라이벌 유방에게 고스란히 넘기고 이렇게 자결했으니 누가 봐도 아쉬움이 남는 최후였다. 훗날 이곳을 찾은 많은 문인들이 시 또는 문장을 지어 항우의 넋을 위로했다.
이번 사자성어는 권토중래(捲土重來. 말 권, 흙 토, 거듭 중, 올 래)다. 앞 두 글자 ‘권토’는 ‘땅을 말다, 즉 많은 병력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신속히 전진하다’란 뜻이다. ‘중래’는 ‘다시 돌아오다’란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돌아오다’란 의미로 주로 쓰인다.

‘어차피 전투에서의 승패는 예측할 수 없으니(勝敗兵家事不期), 지더라도 수치를 안고 부끄러움을 이겨내야 대장부라네(包羞忍恥是男兒). 강동 땅에 뛰어난 젊은이 많았으니(江東子弟多才俊), 항우가 권토중래했다면 최후 승자를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으리라(捲土重來未可知).’
당(唐. 618~907)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제오강정(題烏江亭)’, 이 마지막 구절에서 유래했다. 동산재기(東山再起)와 사회복연(死灰復燃)이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두목은 당나라 말기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게다가 뭇 여인의 시선을 끄는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청년으로 성장했으며, 25세엔 진사(進士) 시험에도 합격했다. 성격은 강직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길 싫어했다. 자(字)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이다.
그가 이처럼 고위 관료로 승진할 수 있는 여러 유리한 조건을 갖췄으나, 당나라 말기 조정은 꽤나 어수선했다. 우승유를 중심으로 뭉친 신진 세력과 이덕무 중심의 권문세족이 힘을 겨루다가 차츰 이전투구로 치달은 ‘우이당쟁(牛李黨爭)’이 한창이었다. 국력은 해가 갈수록 약해졌고, 두목은 자신의 앞날도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다고 느꼈다.
그의 시풍은 두보(杜甫. 712~770)와 비슷하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생계가 불안정했고 ‘안녹산의 난’까지 겪은 두보처럼 불우한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두목도 국운이 쇠하고 망국의 조짐이 뚜렷한 당나라 말기를 고뇌하는 지식인 관료로 살았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두목의 내면 세계가 두보와 대동소이했을 것으로 우리가 짐작해볼 수 있다. 두보를 염두에 두고, 두목을 소두(小杜)로 칭하기도 한다.

두목은 49세로 일찍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묘비명(墓碑銘)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죽음을 앞두고 꾸었던 기이한 꿈들을 묘비명에 상세히 묘사해 꽤 흥미롭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자신의 심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 후대에 남기려는 그의 진지한 태도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허세와는 거리를 둔 삶을 살았으면서도, 죽음을 예감한 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미남 천재 시인은 자신의 작품 일부를 불태워 없앴다.
‘bouncing back stronger’는 ‘권토중래’의 의역이다. 아무래도 문인이 남긴 말이라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강남춘(江南春)’, ‘석춘(惜春)’ 등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의 여러 작품들과 함께 읽어보면, 기울어가는 조국의 현실을 극적으로 회생시킬 어떤 계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제오강정’ 한 구절에 담은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어떤 일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여 일정한 성취에 이르렀다가, 갑자기 큰 실패를 맛볼 수 있다. 바로 그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순간에 ‘권토중래’의 이미지를 한번 떠올려보는 것도 조금은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기발한 아이디어나 돌파구가 스쳐갈 가능성도 있다. 좌절하거나 재기를 쉽게 포기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 가운데 이 네 글자보다 더 기세등등하긴 쉽지 않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