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성금 '기준점'…재계 서열별로 기부액 유지
현대차그룹, 지난해부터 100억 높인 350억원으로 '서열 파괴'
중견기업 고려아연도 2015년 이후 '대기업 수준' 30억원씩 쾌척
연말을 맞아 주요 기업들의 이웃돕기 성금 기부가 줄을 잇고 있다. 대외 불확실성이 커지고, 일부 기업은 실적 악화로 긴축에 나선 상황이지만 대부분 지난해와 같은 수준의 금액을 기부했다.
20일까지 이웃돕기 성금을 기부한 기업들의 기부 현황을 살펴보면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SK그룹, LG그룹 등 4대 그룹만 해도 총 1090억원에 달한다.
삼성은 주요 기업들 중 가장 이른 시점인 이달 2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500억원의 성금을 기탁했다.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SDS,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삼성증권, 삼성물산, 삼성E&A, 제일기획, 에스원 등 23개 관계사가 성금 기탁에 참여했다.
재계 서열 1위인 삼성은 연말 이웃돕기 성금 뿐 아니라 재해복구성금 등 각종 기부 활동에서 다른 기업들이 참고할 기준점이 된다. 삼성이 먼저 기부금을 확정하면 다른 기업들이 자산이나 매출 규모에 비례해 기부 규모를 정하고 뒤따르는 방식이다.
삼성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는 매년 100억원씩, 2004년부터 2010년까지는 200억원씩, 2011년은 300억원, 2012년부터는 500억원씩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26년간 기탁한 성금의 누적 총액은 8700억원에 이른다. 다른 기업들은 이를 기준점 삼아 성금 액수를 정해왔다.
현대차그룹은 재계 서열 2위이던 시절, 삼성의 절반인 250억원을 연말 성금으로 기탁해 왔고, 3‧4위였던 SK그룹과 LG그룹은 현대차그룹의 절반인 120억을 기부했었다. 이 기부액은 SK그룹과 현대차그룹의 서열이 뒤바뀐 이후에도 한동안 유지됐다.
미묘하게 뒤틀린 재계 서열과 기부액의 상관관계는 지난해 현대차그룹이 기부액을 100억원 늘리면서 더 크게 흔들렸다. 2023년 주요 계열사들이 사상 최대 실적을 낸 현대차그룹은 연말 350억원의 성금을 쾌척했다.
현대차‧기아 등 주요 계열사들의 사상 최대 실적 재경신이 예상되는 올해 역시 현대차그룹은 350억원의 기부금 규모를 유지했다. 2003년부터 올해까지 22년간 현대차그룹이 기탁한 성금의 누적 총액은 4290억원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대외적으로 널리 공개되는 연말 성금 기부액은 한 번 높여 놓으면 기업이 심각하게 흔들리지 않는 한, 당해 실적이 부진하더라도 다시 낮추기에는 외부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면서 “그럼에도 현대차그룹이 재계 서열과 무관하게 기부액수를 크게 높인 것은 앞으로의 실적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이자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SK그룹과 LG그룹은 올해도 각각 120억원씩 기부했다. 1999년부터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희망나눔 캠페인에 참여한 SK의 누적 기부액은 2465억원이다. 같은 기간 LG의 누적 성금 기부액도 2400억원으로 비슷한 수준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지정 공시대상기업집단 재계 서열 5위 포스코는 10여년간 매년 100억원씩을 기부하고 있다. 올해도 같은 금액을 유지했다.
이후 서열부터는 기부액이 10억 단위로 줄어든다. 재계 7위 한화그룹과 9위 GS그룹은 각각 40억원, 8위 HD현대와 14위 한진그룹은 각각 20억원을 연말 성금으로 냈다.
HD현대는 지난해 재계 서열 9위에서 올해 8위로 오르며 GS와 자리를 맞바꿨으나 성금 액수는 두 회사 모두 지난해 수준을 유지했다.
지난해 70억원을 냈던 재계 서열 6위 롯데그룹은 올해 아직 성금 기부를 발표하지 않은 상황이다. 롯데건설발 유동성 위기설이 터지며 비상 경영을 이어가고 있어 지난해와 같은 기부액수를 유지할 수 있을지 관심이다.
공정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에서 영풍그룹(32위)에 속해 있는 중견기업 고려아연은 기업 규모와 무관하게 매년 거액을 쾌척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연말 성금 기부액은 30억원으로, 재계 서열 8위 HD현대보다 높다.
고려아연은 2015년부터 매년 연말 성금으로 30억원씩 기부해 왔다. 그 이전에도 2013년과 2014년 20억원, 2012년 10억원 등 기업 규모에 비하면 기부액이 컸다. 각종 재해 구호 성금도 웬만한 대기업을 상회하는 수준을 쾌척했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통상 매년 영업이익의 1% 가량을 사회공헌활동 금액으로 사용해 왔다”고 설명했다.
일부 기업의 성금 기부가 발표되지 않은 상태지만 여러 기업들이 경영 불확실성에 처해 있음에도 대부분 지난해와 같은 수준의 기부금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을 비롯한 주요 기업들은 “올해 경영 환경이 어려운 가운데에도 연말 성금 규모를 작년과 같이 유지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2012년 이후 13년간 성금 규모가 매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 것은 우리 기업과 경제의 성장이 정체됐음을 의미한다는 우려도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기업들의 연말 성금 규모가 빠르게 커진 시기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높아짐을 보여줌과 동시에, 기업의 성장 속도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했다”면서 “이 금액이 10년 넘게 늘지 않았다는 건 성장 동력이 약화됐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일부 기업은 실적 악화로 연말 기부금이 부담이 될 정도로 자금난을 겪은 해도 있었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기부금 규모는 유지해 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