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레이스가 지구촌의 이슈를 집어삼킨 덕분에 관심 밖의 일이 되긴 했지만, 영국에서도 거대 양당 중 하나인 전통의 토리(보수당은 토리당의 후신으로, 영국에선 보수당 지지자를 토리라 부른다), 보수당의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가 있었다. 브렉시트로 대변되는 데이비드 카메룬을 시작으로 제2의 마가렛 대처라 불릴 뻔한 테레사 메이, 더벅머리 논란 덩어리 보리스 존스, 40일 천하 리즈 트러스, 인도계 영국인으로는 최초의 영국 총리에 오른 리시 수낙까지.
비록 역사상 최악의 총선 참패로 지금은 뒷방 늙은이로 전락했지만, 14년간 5명의 총리를 갈아치우며 영국을 좌지우지했고 영국 전통을 고수하는 기둥 역할을 해 온 정당이기에 새로운 당수의 선출 소식 정도는 짚어 봐야 할 것 같다.
첫 흑인 여성 보수당 대표
출처 - (링크)
지난 토요일, 1980년생(만 44세)의 흑인 여성 케미 베이드녹(Kemi Badenoch)이 보수당의 당수로 선출되었다. 여성이나 타인종이 대표로 선출된 적은 있지만, 흑인 여성이 거대 정당, 그것도 전통을 고수한다는 보수당의 당수가 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개인적으로 ‘흑인’ 혹은 ‘여성’ 등으로 인종/성별을 구분 지어 표현하는 화법을 극도로 꺼린다. 당대표면 당대표지 뭔 흑인 여성 같은 수식어를 붙여야 하나. 이런 표현 자체가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숱한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흑인 여성’을 강조하니 대체 왜 이런 식의 표현이 난무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일단, 파격적이긴 하다. 영국의 보수당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옥스포드. 지난 14년 정권 동안 올랐던 총리들은 모두 옥스포드 출신이었다. 게다가 카메룬, 존슨 전 총리는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튼(Eton School) 출신이다. 집안이나 재력, 인종을 언급하기 전, 보수당은 사립학교-옥스포드 라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런데 이 공식이 깨졌다. 이번에 선출된 케미는 영국 남부에 위치한 서섹스(Sussex)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 학부/석사과정을 마친 IT 전문가다. 게다가 국회의원을 시작한 시점도 2015년이니 공식적으로 정치인의 행보를 택한 지는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정치인으로 이렇다 할 이력이 보이지도 않는다. 정부마다 주요 요직을 선점해 정부를 위해 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이 시점에 보수당의 당수가 될 수 있었을까?
지능적 차별 VS 내연 확장
출처 - (링크)
지난번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은 역사상 가장 저조한 실적을 보이며 노동당에 참패했다. 총 650석 중 노동당은 412석, 보수당은 121석으로 차이가 3배가 넘는다.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사실상 엄청난 차이다. 지난 50년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박빙의 승부가 한쪽으로 완벽하게 기울어졌다(우리나라로 치면, 민주당 220석, 국민의 힘 70석 정도가 된다). 거대 여당의 모습을 하고 있던 보수당이 소규모 정당으로 전락한 것이다.
우리와 달리, 영국은 완벽한 승자독식이다. 협치? 그런 거 없다. 의석수가 모자라면 실제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여당의 정부 운영을 비판하고 그림자 내각을 통해 대안을 내놓는 등의 일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야말로 정책을 제시하는 정도다. 다른 당과 협력해도 여당이 이끄는 정국에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는 그야말로 허수아비 같은 존재다. 현재 영국 보수당이 처한 위치는 처참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흑인/여성 당수라는 유례없는 선택을 한 진짜 이유는 뭘까?
파티 게이트의 주인공, 보리스 존슨 전 총리
출처 - <로이터>
그동안 보수당은 백인, 고학력, 고소득 상류층의 전유물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옥스포드 출신의 정치인이 가장 많은 정당이고, 전 총리였던 리시수낙은 억만장자다. 다수의 의원들이 2-3곳의 별장을 소유하고 있고, 때 되면 각종 스포츠 행사에서 일등석을 차지한다. 점점 어려워지는 경제 상황에 이들의 이미지가 좋아 보일 리 없다. 국민들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매번 선택하는 정책들은 부자를 위한 기반 마련에 급급했다. 이번 총선에서 득표수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지만, 선거는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법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영국 국민들은 이런 보수당에 대한 기대를 접은 듯하다.
그래서일까? 이전과는 다른 파격적인 인사가 감행되었다. 물론, 투표에 의해 보수당 대표가 결정됐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많다. 지난번 영국브리핑에서도 다뤘듯, 리시 수낙이 보수당의 당수가 되면서 총리에 오른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닐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처참한 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인도계 영국인 수상의 몫이 되었다. 임기 12년, 브렉시트와 코비드, 파티 게이트 등 숱한 논란 속에 마지막 청소해 줄 자리에 유색인종을 앉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412 vs 121.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 대표에 흑인 여성을 앉혔다. 그동안의 보수당 이미지를 탈피하고 새로운 스펙트럼을 개척한다는 이미지를 구상했지만, 이것이 내연 확장인지, 아니면 지능적인 차별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그간 당 대표에 이름을 올렸던 거물급 정치인들이 이번 선거를 고사했고, 다수의 새내기 정치인이 경합을 벌였다는 점, 새 리더를 왜 지지하게 되었냐는 인터뷰에서 늘 용기를 북돋아 주기 때문이라는 어이없는 발언들이 난무했다는 점 등은 확실히 미심쩍다.
인종차별주의자?
“Sorry, but all British people are racist.”
(영국인들은 모두 인종차별주의자야)
어느 날, 영국인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이다. 너무 솔직하기도 했고, 이런 말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고맙게 느꼈던, 잊히지 않는 말이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난민을 받는 상황에서, 우리는 우월한 민족이니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은 신사 나라의 미덕이라는 식의 태도가 못마땅했던 친구였다. 겉으로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도덕/윤리적으로 의식 있는 사람들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난민 수용 정책은 실제로는 마음 깊숙한 곳에 뿌리내린 차별화된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정책이라는 걸 집어낸 언사였다.
한 사람의 의견이 다수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그의 말은 많은 걸 시사하고 있었다. 그의 발언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면, 현재 영국 정치가 직면한 문제에 대입해 보면 많은 부분에서 쉽게 답을 구할 수 있다. 또 그동안 영국이 해 왔던 많은 일의 원인도 규명할 수 있다.
출처 - (링크)
이번에 당선된 보수당 대표의 프로필을 보면, 그녀의 고등학교 성적표와 그녀가 어느 대학에 입학했는지까지 적나라하게 표기되어 있다. 참고로 영국은 우리와 달리 A-level이라는 시험을 치르고 네 과목 중 성적이 가장 좋은 세 과목을 선택해 대학입시에 활용한다. 고작 서너 과목 공부하고 대학 입학하는 거야? 개꿀이네?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과목마다 웬만한 대학교 2~3학년 수준의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깊이가 다르다. 우리는 다양성을 추구한다면 영국은 전문성을 추구하는 교육 방침의 차이다.
어쨌든! 케미 베이드녹은 생물/화학/수학을 선택해 최종 성적 B/B/D를 받고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는 걸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지금까지 당대표의 고등학교 성적표가 공개된 일이 드물었는데 의외다. 과연 이들이 유색인종의 여성 리더를 제대로 인정은 하는 걸까?
저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결정과 정책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니 비록 이번 보수당의 선택이 지능적 차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꿈틀거린다 해도, 어떻게든 변화의 물꼬를 트려는 이들의 노력은 가치가 있다. 또한 자신이 인종 차별주의자임을 인정하고 차별금지법을 법제화하여, 인간에게 통용될 수 있는 모든 차별의 루트를 차단하려는 결단은 칭찬할 만하다.
첫 PMQ(Prime Minister’s Questions)에 등장한 영국 보수당의 대표 케미 베이드녹은 우려와는 달리 당당하고 침착하게 첫 임무를 잘 수행해 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진심이 무엇이든 간에, 나이지리아 출신의 이미 1.5세대 흑인 여성이 영국 보수당의 리더가 된 것은 분명 상징적인 사건이다.
현재 영국의 보수당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아무리 잘해봐야 본전치기다. 그래서 보수당의 선택이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주저앉아 이전의 것들을 고수할 수도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 이들의 선택은 변화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