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기에 진심이다. 적당히 달궈진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한 면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뒤집고 각자에게 잘라 놓아주는 것까지 끊김 없이 이어져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대형 고깃집에서 회식이 있었다. 종업원이 등심 한 접시를 가져와서 불판에 무성의하게 두 덩이를 던지듯 올리더니, 마구 뒤집다 자르고 가버렸다. 고기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제대로 구워지지 않은 고기는 질기기만 해서 대화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짜증만 남았다.
이러니 집에서도 집게는 내 차지였다. 아이가 어릴 때 한번은 구워보겠다고 집게를 들었다. 넘겨준 채 매의 눈으로 “지금 뒤집어야 해” “너무 크게 잘랐다”며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게를 허용하는 최대치는 삼겹살까지였다. 오랜만의 외식에서 비싼 고기가 타버리면 내 표정도 타들어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안과 달리 이것만은 관대하지 못한 탓에 아이는 ‘제가 할게요’를 하지 못했다.
얼마 전 교외의 정육식당에서 등심을 먹었다. 이번엔 아이가 스스럼없이 집게를 쥐고 고기를 굽는데 뭐라고 할 부분이 없었다. 딱 적당할 때 뒤집고 잘라서 나와 아내 앞에 한 점씩 놔준다. 이제 성인인 아이는 자기 돈으로 사 먹으며 경험이 늘었던 것이다. 오 이거 편하다. 그냥 먹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온전히 즐기면 되어서 아주 좋았다. 미리 집게를 넘겨줄걸 하는 후회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런데도 놓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연상은 엉뚱하게 전에 만났던 청년으로 이어졌다. 그는 온순하고, 공손하며 모난 부분이 안 보였다. 예상 못한 스트레스에 어느 순간 무너져 내렸고, 심한 불안으로 이어졌다. 이전의 살아온 궤적을 보면 이 정도로 멘털이 무너질 취약함이 없었고, 자라면서 심한 결핍이나 학대의 경험도 없었다. 좋은 환경에서 어려움 없이 잘 자라서 사회적으로도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어쩌다 그리 심한 불안과 바스러지듯 무너질 것 같은 허약한 자아를 노출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부모를 만나면서 빠진 퍼즐 조각이 채워졌다. 이런 부모는 자기 대에서 큰 성공을 이룬 분들로 그만큼 자신이 맞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자식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하며, 사랑도 유별나게 깊다. 일에서 성취한 만큼, 가정도 화목하고 완벽하기를 바란다. 대화를 해보면 온화하고 관심의 영역도 넓고 상식도 풍부한 편이라 막힘이 없다. 이들의 특징은 일에 대한 성취만큼 자식에 대한 기대치도 높다는 것이다. 특히 자기 일을 물려주거나,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엄격함은 어떨 때는 냉혹해 보이기도 한다.
모든 것을 베풀어주고 보호하는 아버지와 가혹하고 냉정한 잣대를 맞추기를 요구하는 상사의 두 역할을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런 요구에 자식은 두 개의 선택을 한다. 하나는 강한 저항을 하며 둘 사이의 대등한 균형점을 잡거나 아예 다른 일을 찾는 분리를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저항을 포기하고 정해준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가 의외로 부서지기 쉬운 자아가 되어버리고는 한다. 혼자 실패를 감내하고 좌절하며 다시 일어서는 경험을 못해본 후폭풍이다.
부모의 일에 대한 애착과 자식에 대한 애정, 양쪽의 욕망과 불안을 모두 자식에게 투사한 결과다. 일과 양육 둘 모두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불안은 부모가 자식에게 권한을 넘기고, 능숙해지는 과정에 불가피한 실패를 견뎌내는 기다림의 시간을 허용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랑하는 것일수록 그 불안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고 그 선택은 부모의 역할이다.
내가 고기를 태울까 조마조마하며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나중에 모든 일을 미리 넘기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 전에 적당할 때 좋아하는 일일수록 고기집게를 넘겨야 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대부분 자식이 아니라 부모의 불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