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동학속으로] (12) 충남 공주 우금치

2024-09-23

우리에겐 지켜야할 나라가 있었다

우주 전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하늘아래 자리를 잡으면서

인간은 지식 한계로 하늘을 가리며 우주와 단절 하고 있다

사람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도 심안통 열어내어

한울님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지혜로운 조화력을 발휘하자

땅에서는 땅이 주는 참된 은혜로 생명력 의지하고 살면서도

인간욕망 한계로 땅을 파헤치고 짓눌러 자신을 죽이고 있다

스스로 자연 섭리를 알고 서로 가르치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대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지혜로서 교화력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 인과 관계로 인생 무대 열어가면서도

사람과 부딛혀 서로가 등지고 살아가는 잘난 독불 장군이다

성공한 사람도 성공하지 못한사람도 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성취한 목적보다 과정이 중요하니 치화력은 터득해야 한다

대자연과 더불어 사는 교감으로 행복해지는 체험현장에서는

사철변화에 적응하여 역행보다 순행으로 역사 돗 띄워 보자

인간 지식과 정보력이 시공을 넘나드는 최첨단 과학 시대에

우리는 세계의 안목을 넘는 경이로운 한울 조화현장에 있다

종교에는 국경이 없으나 신앙인에게는 지켜야할 조국이기에

진정된 애국심으로 나라를 지키며 찬란한 문화를 계승했다

나라사랑 역사 지키는 일은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없는 일로

동학군들은 우금치에서 스스로가 국경선 되어 외세에 맞섰다

 /백승기 박사

▲동학 혁명군 우금치에서 일본군을 만나다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의 3차에 걸친 전투는 이인전투와 효포전투, 그리고 우금치전투이다. 이인전투는 손병희 통령의 북접농민군이 싸운 전투이고, 효포전투는 남접농민군이 벌인 전투이다. 우금치전투는 남북접농민군이 일제히 우금치와 견준봉, 그리고 봉황산 일대에서 전개한 전투이다.

우금치에서 동학남북접농민군 2만여명과 조선관군·일본군 연합군이 격돌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미나미 소좌가 이끄는 독립 제19대대를 중심으로 9개 중대 600여명 . 조선군은 순무영 및 친군 경리청 2개 대대(약 1,000명)와 일본군에게 훈련받고 일본군 지휘계통 아래 있던 최정예 교도중대(350여명)였다. 이들의 진압 작전은 철저하게 일본군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이때 일본 제국 육군은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을 썼고 관군 역시 레밍턴 롤링블럭과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 등을 썼다.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일본 연합군은 관군 경군 병력이 주력이었으며 일본군은 후비대대라는 특성상 중화기 보유량이 전무했기에 전투에 동원된 회선포와 기관포, 야포는 모두 관군이 가져온 것이었다. 전투 지휘를 주도한 지휘관도 처음에는 충청감사 박제순이 맡았지만 일본군이 증원온 뒤부터는 일본 육군 후비 보병 중대와 동행한 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육군 보병소좌가 맡았다.

결과로 보면 동학농민군의 대패였고 첨단 무기와 화력의 승리였다. 일부는 이를 두고 일본의 신기술과 군사력에 조선백성이 무지한 저항과 우매한 믿음으로 인한 당연한 패배라 말하며 일본의 강제 합병에 의한 지배를 조선조정과 조선백성에게 책임이 있다. 이러한 논리로 한일합병 이후 일본이 무지와 우매한 조선을 일부분은 발전시켰다는 괘변으로 이어져 패전국 일본의 입 노릇을 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죽음과 희생은 무장 의병투쟁, 3.1독립만세운동,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져 끊임없이 싸웠다. 앞으로도 우리에게 동학농민전쟁은 싸워서 빼앗길지언정 스스로 내어주지 않는 항쟁의 역사로 기억 될 것이다.

▲목숨바쳐 지키려한 민족의 얼 <신동만 한국나그네연맹 회장> 구한말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에 의한 기독교의 전파는 조선의 급속한 변화의 한 줄기였다. 고루한 유교의 성리학적 전통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서구의 종교와 정치이념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특히 신분질서에 대한 천민들의 각성과 탐관오리들의 탐학에 저항하는 일반 백성들의 원성이 혁명적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때 전통적인 유불선을 통합한 동학의 사상은 민족의 얼을 기반으로 하는 변혁의 이념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조선과 국교교섭을 시도하였다가 거부되었다. 1873년 고종의 친정으로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은 1876년 군함 8척과 600명의 병력으로 강화도를 점령하고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개항과 치외법권 등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가 관철된 불평등조약이었다

결국, 1894년 6월 일본군은 존엄한 군왕의 처소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점령하고 일개 군인 나부랭이가 칼을 빼어 왕을 겁박하였다. 국가와 민족의 순결한 자존심에 상처를 낸 일본과 서구 열강에 대항하여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로 2차 동학혁명이 시작되었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대의와 목숨을 다해서라도 겨레의 얼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우금티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의 참담함<김주원 뱅기노자 대표, 교사> 민씨 척족 세력이 준비도 없이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개항을 단행함으로써 서양 세력과 일본인들의 활동 무대를 활짝 열어준 지 20여 년이 되어가던 1894년 5월. 불평등한 신분 제도를 깨뜨리고 생존 조건을 해결하려는 농민 봉기군이 전라감영을 점령하자, 조선 정부는 청에 구원병을 요청했고 이에 질세라 일본군도 부랴부랴 인천에 상륙한다.

일본군은 그 해 7월24일 선전포고 없이 풍도에 주둔 중인 청군을 기습 공격하며 조선에서의 우위를 점하게 된다. 또한 조선 관군을 앞세워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10월 말경 공주로 들이닥쳤다. 동학 농민군은 구식 화승총과 칼, 창을 들고 잘 훈련되고 성능 좋은 신식 무기를 지닌 일본군과 우금티에서 대결하니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본군이 충청감사 박제순을 앞세워 동학 농민군을 향해 공격하자, 동학 농민군은 “총부리를 왜놈들에게 겨누어라. 왜 동족을 살상하느냐!”고 외쳤으나 빗발치는 총알 세례로 추풍낙엽 같은 희생을 치르고 말았다. 수십 차례 밀고 밀리는 싸움으로 2만에 달하는 동학군은 5백여 명만 살아남는 참담한 패배를 우금티에서 맞이한다. 우금티 전투가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필연은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스스로 개혁할 기회를 상실하여 외세를 끌여들였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 탐방팀은 무더위로 온 국민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여름날, 땡볕을 받으며 우금티에 오른다. 공주 시내는 한 줄기 바람조차 잠들어있던 날, 우금티에 올라서니 제법 강한 바람 불어오는 것이 마치 그날의 처절한 함성을 전해주는 듯하여 숙연해진다. 우금티 아래 터널을 지나시거든 부디 농민의 삶과 나라의 안위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선령을 위로해 주시기 바란다.

▲우금치와 충청감영의 역할<박창보 글로벌사이버대 선도문화학과 특임교수, 국학박사> 충청감영은 여말 설치되었던 양광도가 전신으로서 조선 태종 시기 지방행정제도가 정비되어 8도와 군현제가 확립된 후 경기, 경상, 전라, 강원, 함경, 평안, 황해 등에 설치된 감영 중 하나이다. 태조가 충주와 청주목의 첫 글자를 따 충청도라 칭한데서 유래하며 관찰사(현재의 도지사)를 수장으로 파견하여 54개 고을을 관할하였다. 관찰사는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겸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부윤과 목사까지 겸임하였다. 충청도는 삼강과 오상을 어지럽히거나 역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도명이 바뀌는 일이 많았으나 일일이 거론하지 않는다. 임진란 이후 호남의 내륙으로 침입하는 왜적으로부터 한양의 방어를 위해 청주에서 공주로 이영하였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금강이 흘러 방어와 사통팔달의 천혜적 지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32년 대일항전기에 대전으로 충남도청이 이전하기까지 그 역할을 다 하였다.

1894년 일본의 내정간섭에 분노한 동학군이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거점으로 삼은 곳이 공주였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조정에서 관군을 급파하여 충돌한 곳이 이인역, 효포, 곰티 등이었다. 일시 경천으로 후퇴했던 동학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하마루, 옥고개, 막골을 지나는 삼남대로를 따라 우금치를 넘보았다. 11월 9일 최후의 전투가 된 우금치는 동학군이 10:1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화력 앞에서 패주를 거듭하였다.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동학군은 훈련조차 받지 못한 민병이었으며 당시로선 최신식의 무기 성능과 높은 고지에서의 유리한 이점을 지닌 조일연합군에 비해 인해전술로 전면전을 벌인 것이 패배의 요인이었다. 지도부의 반목과 낮은 군기도 한몫 했을 것이다. 결국 대부분 전사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와해됨으로서 결집이 불가능하였고 그나마 유생들의 토벌대에 희생되거나 처형되었다.

이 해에 3명의 관찰사가 교체되었는데 중과부적과 무능으로 미처 수습하지 못하자 연거푸 바뀌었고 최종적으로 박제순이 일본군과 더불어 신식무기를 앞세워 학살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동학군을 진두지휘하며 골육상쟁을 피하고 항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관군의 동참을 촉구하는 글을 보냈던 전봉준과 지도부를 체포, 압송하였다. 후일 박제순은 외무대신 신분으로 을사늑약에 조인한 오적 중 하나가 되었다.

▲파랑새 꽃을 피워야 한다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는 천지인 삼합정신으로 홍익인간 이화세계다.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홍익인간 사상은 사인여천 이화세계를 그리면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이 서로 어울리며 상생하는 가운데 공생공존을 이룩 하고자 하는 위함이었다.

나라가 위기에서 힘들 때마다 관료의 부정부패와 외세의 침탈이 심했다.

우리는 외세에 의한 침략으로 수많은 수탈을 당하면서도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조국이 있었기에 목숨 걸고 싸웠다.

역사 탐방단 일행은 무더위 속에서도 30만 동학도의 거친 숨결을 느끼며 공주 우금치 피맛골 역사현장을 찾았다.

뜨거운 태양아래 에도 밤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우금치의 여름밤은 풀벌레 소리와 함께 깊어만 갔다.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자문위원

△박창보 글로벌사이버대 선도문화학과 특임교수, 국학박사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슈퍼바이저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고혜선 안중근장군 전주기념관장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신동만 한국나그네연맹 회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김설희 (주)그라투스 이사

△이주원 디자인 원 대표

이방희 기자

저작권자 © 전북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