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들어 절대 수준이 높아지긴 했지만, 이 나라에서 ‘고(高)환율’은 일상이었다. 아니, 어쩌면 숙명에 가까웠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 어떻게든 달러를 벌어와야 하는 비(非)기축통화국이 우리의 위치였으니 말이다. 현장에서 만난 베테랑 경제관료들은 이를 “대내균형보다 대외균형이 중요하다”란 말로 정리하곤 했다. 물가와 고용도 중요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경상수지와 환율 관리가 최우선이란 의미였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의 트라우마가 겹치면서 이런 인식은 더욱 확고해졌다.
‘수출 증가=일자리’ 깨지며
물가만 치솟고 내수는 위축
뉴노멀 아닌 ‘자국민 궁핍화’
이런 관성이 작동한 것일까. 계엄사태의 혼란이 조금씩 잦아들던 올 상반기 이후, 당국자들의 표정에선 눈에 띄게 긴장감이 사라져갔다. 환율이 여전히 달러당 1400원 선을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다. 경상수지 흑자가 이어지는 상황인 데다 변동성도 잦아들어 큰 위기가 불거질 가능성은 작다는 게 이유였다. 여기에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수출에도 도움이 될 텐데 굳이 손댈 필요가 있겠느냐는 속내도 있었다. ‘1400원대는 뉴노멀’이란 말이 나온 배경이다.
하지만 10월 이후 이상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달러 약세에도 원화가치가 더 떨어지며 환율이 상승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자연히 구매력을 기준으로 한 환율도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급기야 계엄사태 때 수준을 넘어 1500원 선을 위협하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외환당국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일단 한국은행이 팔을 걷어붙였다. 11월 금리를 동결한 데 이어 ‘인하 기조’도 거둬들였다. 불안한 집값과 함께 ‘환율 쏠림’이 중요한 이유였다. 이창용 총재는 “(환율 움직임이) 외환시장의 불안을 만들어낼 정도는 아니다”라면서도 “한 방향으로 쏠리다 보니 환율로 인해서 물가가 굉장히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우려된다”고 했다. 급등한 환율이 2~3개월 시차를 두고 물가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고려하면 최소 내년 상반기까진 금리 인하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게 시장의 관측이다. 환율 불안이 통화정책의 손발을 묶어버린 셈이다.
공은 정부로 넘어갔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주요 수출기업을 소집해 사실상 달러를 풀어달라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이어 외환시장의 ‘큰 손’ 국민연금과 협의체를 만들어 ‘환율 관리’에 나서겠다는 뜻도 시사했다. 환율이 오른다는 건 외환시장에 달러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는 의미다. 공급자는 수출기업인데 벌어온 달러를 제대로 시장에 풀지 않고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여기에 서학개미들과 국민연금의 해외 주식투자로 확 늘어난 달러 수요도 좀 눌러놓아야 한다는 논리다.
당장 1500원 선을 방어하려면 이런 대증요법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진즉에 거시경제 안정에 좀 더 신경 썼으면 이 정도로 부산떨 일도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기업들이 달러를 쟁여놓고,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를 늘린 게 하루이틀새 일어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환율의 이점은 점점 약화하고 부작용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간 어느 정도의 고환율 정책이 공감대를 얻었던 건 우리 경제에 선순환 구조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벌어온 달러를 국내로 들여와 공장을 세우고 투자를 했다. 일자리를 얻은 근로자들이 소비를 늘리면 그 돈으로 자영업자들이 먹고살았다. 그런데 이 구조가 최근 몇 년 사이 급속히 무너졌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보호무역주의에 해외투자를 늘려야 하는 기업들로선 굳이 나라 밖에서 번 돈을 국내로 들여올 필요가 없다. 설령 단기로 굴리더라도 금리가 높은 해외에 두는 게 수익성이 나았다. 여기에 대미투자를 크게 늘리기로 한 한·미 관세협상의 결과가 결정타를 날렸다. 기업들로선 달러 필요한 일이 더 늘었으니 말이다. 이러니 수출 호황에도 일자리는 잘 늘지 않고, 물가만 치솟아 내수는 더욱 쪼그라든다.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의 해외투자가 늘어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성장성이나 안정성에서 국내보다 해외가 낫다고 판단한 결과다.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저성장이 고착화하고 있는 데다, 경기부양용 재정 적자 확대에 앞으로 원화의 가치도 떨어질 일만 남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상황을 되돌릴 근본처방은 이런 쏠림을 만든 ‘기대의 편향’을 바로잡는 것일 수밖에 없다. 방만한 재정 단속에 나서는 등 거시경제를 안정시킬 대책과 함께 수출 증가가 국내 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를 복원할 대책이 추진돼야 한다. 구조화된 고환율이 ‘근린 궁핍화’(beggar-thy-neighbour)가 아닌 ‘자국민 궁핍화’로 귀결되기 전에 말이다.
![[ET톡] 서학개미 탓보다 중요한 것](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5/12/01/news-p.v1.20251201.d8e2b25dfc014e1e845f88ee14f46bcd_P3.jpg)



![美 블랙프라이데이 저가만 흥행…中 제조업은 8개월째 위축 [글로벌 모닝 브리핑]](https://newsimg.sedaily.com/2025/12/01/2H1K6OLMW5_1.jpg)

![연준 QT 종료에 유동성 확대…산타랠리 vs 물가 자극 엇갈린 전망 [AI 프리즘*글로벌 투자자 뉴스]](https://newsimg.sedaily.com/2025/12/01/2H1K7QQ4BV_1.jpg)
![[로터리] 부동산 오답노트](https://newsimg.sedaily.com/2025/12/02/2H1KPV4IF1_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