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여름은 정말 더워도 너무 덥다. 매년 여름은 계속 더워지고 있다는데, 진짜 죽을 맛이다. 바깥을 잠시 걷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힌다. 피서를 가거나 여행을 가도 더운 건 마찬가지다. 지옥을 걸어 다니면 이런 느낌일까. 얼마 전, 병원 갈 일이 있어서 병원 건물에 주차해 두고 옆 건물로 커피를 사러 갔다. 5분 정도 걸었나, 그 새 얼굴이 말갛게 익었고 입고 간 티셔츠가 다 젖을 정도로 땀이 흘렀다. 병원 건물로 들어서면서 겨우 살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죽다가 살아난 기분이었다. 천국을 걸어 다니면 이런 느낌이겠지. 이렇게 시원한 천국이라니. 병원에 들어서니 간호사는 불긋한 얼굴에 온몸이 땀으로 축축한 나를 보면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고작 커피가 먹고 싶었을 뿐인데.
누군가 그랬다. 대한민국은 재미가 넘쳐나는 지옥이라고. 놀고 싶으면 늦은 밤까지 먹고 마시면서 놀 수 있으니. 맛있게 먹고 취한 채 밤을 지새우며 스릴 넘치고 짜릿한 일들이 넘쳐난다고. 당장 스마트폰을 열어 유튜브 명상 몇 개만 봐도 많은 사람이 지옥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라면 10개, 돈가스 20인분을 먹는 먹방 재미있는 지옥, 연애 프로그램에서 조건에 맞춰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도, 40대에 안 하면 바로 불행해지는 것, 당장 손절해야 하는 사람과 관련된 영상을 보며 현실적인 지옥문을 열어 볼 수 있다. 시시때때로 유행이 바뀌고 도파민 팡팡 터지는 지옥들이 넘쳐난다. 뭐, 천국처럼 영상을 찍으면 조회수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구독, 좋아요는 사랑이니까.
내 인생에서 천국을 생각해 보면 결혼하기 전, 엄마와 아빠의 슬하에서 살았을 때 같다. 부모 나라 천국에서는 엄마가 청소해 주고 빨래해 주고 밥도 차려주었다. 더운 여름날 수박도 사주고 잘라서 접시에 담아 포크로 찍어 주었다. 그것마저 입에 넣기 귀찮아 거실에 나가지 않으면 씨 발라낸 수박을 콕 찍은 포크를 입안에 넣어주었다. 선풍기 바람을 내 쪽으로 돌려주며 엄마는, 내가 지옥에서 무엇을 하면서 노는지, 어떤 악마들을 만나는지 물었는데, 그곳이 천국인지 몰랐던 딸은 솔직히 대답한 적이 별로 없다. 결혼하고 나서 청소와 빨래를 직접 해보고서야 그 시절이 천국이라는 걸 겨우 깨달았고 화장실 청소를 직접 하면서, 음식물 쓰레기 냄새를 맡아보고야, 나에게는 한숨 자라고 말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던 엄마가 진짜 천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심심한 천국보다 화끈한 지옥이 훨씬 화제성이 높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지옥에 살길 원하는 건 아닐 테다. 먹방이 대세이고 대식가와 소식가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을 챙기고 적당히 먹기 위해 애쓴다. 누군가는 밥을 먹을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쁘고, 여전히 누군가는 먹방에 관심조차 없다. 먹방을 보면서 도파민 터지는 걸 즐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먹방이 뭔지도 모르는, 그러니까 왜 보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많으니까.
우리가 태생이 부지런해서 그런가.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하고, 외로우면 머릿속에 지옥의 문이 열린다. 마음이 계속 울렁거리면 언젠가는 터지고 말지. 내가 아직 세상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부모님 밑에서 살았던 시절이 천국이라는 걸 깨달은 정도의 소양으로 말해보자면, 행복하게 산다는 건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인 것 같다. 천국에서만 계속 살면 그 천국을 유지, 보수해야 할 부모님이 너무 힘들어 아마도 악마로 변신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렸을 적에 천국은 천사가 사는 좋은 곳이며, 지옥은 악마가 사는 나쁜 곳이라고 생각했다. 천국 가기 위해 착하게 살라는 말은 옛말, 지금은 착하게만 살면 호구 돼서 당장 먹고사는 데 지장이 생기는 세상이다. 계속 좋은 사람, 무조건적인 행복은 없는 것처럼 악마에게도 배울 건 배우며 지옥을 즐기고, 에너지를 충전해 줄 천국의 지루함 역시 안고 살아야겠지.
천국에서 독립하고 성실하게 지옥을 경험한 후, 천국과 지옥 사이의 어딘가에서 자리 잡는 일, 산다는 건 그런 거 같은데.
어쨌든 한때 나를 천국에 머물게 해주었던 부모님께, 이 더운 날 무탈하신지 안부 전화를.
김현주 울산 청년 작가 커뮤니티 W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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