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 꺼진 무대 위, 버킷햇(벙거지 모자)을 눌러 쓴 청년이 등장했다. 그가 드럼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발끝 아래로 늘어진 초리(상모 끝 긴 끈)가 스르륵 곡선을 그렸다. “다 같이 손잡고 떼루(떼로) 놀자”며 동행을 권하는 청년의 구성진 목소리가 절정을 향해 갈 때 쯤, 음악이 멈췄다. 템포를 높여 다시 시작된 음악은 곧장 속주로 내달렸다. 록 사운드에 얹어진 태평소의 요란한 선율, 기타의 화려한 스케일, 그리고 돌고, 돌고, 또 도는 청년. 그의 양발이 바닥에 닿을 새 없이 허공을 갈랐다.
1일 오후 경기 의왕시 한 스튜디오에서 국악·연희 크리에이터이자 국악 밴드 ‘오름새’의 보컬인 송창현(28)씨가 자신의 자작곡 ‘떼루(Together)’의 연주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송씨는 지난 2021년부터 세계 곳곳에서 촬영한 상모돌리기 쇼츠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일명 ‘냄뚜(namttoo)’로 알려진 국악인이다. 냄뚜는 냄비뚜껑의 줄임말로, 상모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본인이 붙인 별칭이다.
그는 최근까지도 꾸준히 살풀이, 사물놀이, 창극 등 다양한 전통 무대에 올랐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6일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주최하는 ‘한국-중앙아시아 문화의 날’ 공연에 오름새 밴드로, 8·9일 양일 간 남산골에서 열리는 판소리페스티벌에서 ‘공중제비전’의 조연으로 무대에 선다.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기 위해 여행을 떠난 제비가 만난 돛대, 그네 등을 의인화 한 역할 4가지를 맡아 노래를 부르고 태평소를 분다.

그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무대에 설 수 있는 건 7살 때부터 닦아온 탄탄한 기본기 덕분이다. 송씨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니던 어린이집의 방과 후 강사로 온 12발 상모 명인 이금조 선생님께서 ‘재능이 있다’며 국악을 권하셨다”며 “이후 10여 년 간 매주 선생님의 연습실에 가서 상쇠(사물놀이의 리더)가 해야 할 모든 걸 배웠다”고 말했다.
초등 4학년쯤엔 상모 돌리기로 무대에 설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올라왔다. 그는 “꼬마가 꽹과리도 치고 자반뒤집기(몸을 공중에서 회전하고 착지하는 동작을 반복하는 고난도 기술)도 흉내 내니 귀여워보였던지, 관객들이 정말 좋아했다”며 “얼굴을 조이는 상모 끈이 아팠고, 모자는 무거웠고, 선생님의 꾸지람도 싫었지만 무대에만 서면 그런 아쉬움이 다 사라졌다”고 말했다.
음악으로 진로를 결정했을 때, 그 흔한 집안의 반대도 없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국악을 하던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너무 슬펐던 아버지는 그때 ‘다음 생엔 내 아들로 태어나 줘’라고 빌었대요. 그러고 제가 우연히 국악을 시작하게 된 거죠.”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상경한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에 입학, 정통 국악인의 길을 걷는 듯 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룬 순간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대학에 왔는데도 10년 간 했던 음악을 또 하고 반복하고 있던 내 자신을 발견하며 번아웃이 왔다”며 “그런 채로 해군 사물놀이병으로 입대했고, 임무 수행 시간 외엔 1년 6개월 간 악기 연습을 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반환점은 우연히 찾아왔다. 2021년 두바이 엑스포의 K팝 공연에 참여하면서다. 송씨는 주최 측의 요청으로 마샬아츠, 비보잉 등 다양한 분야의 댄서들과 함께 K팝에 맞춘 상모 퍼포먼스를 준비하게 됐다. 국악의 본질을 해칠까 고민도 했지만,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 앞에선 모든 게 잊혔다. 공연을 마친 후 댄스팀 동생들과 함께 놀러 간 사막에서는 12발 상모(초리가 긴 상모)를 쓴 채 모르는 팝송에 몸을 맡기고 느낌 가는 대로 움직였다. 동생들이 촬영해 준 영상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게 국악이냐’ ‘차마 못 보겠다’고 하는 국악계 동료들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계속 쇼츠를 올렸다. 송씨는 “국악을 모르는 분들을 설득할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다”며 “무엇보다 저만이 할 수 있는 퍼포먼스라는 게, 이 분야만은 제가 최초이자 최고라고 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고 했다.
도전은 계속됐다. 올해 그가 새롭게 손을 뻗친 분야는 노래와 작곡이다. 기타리스트, 드러머, 키보디스트, 그리고 국악인 친구들과 함께 국악 밴드 ‘오름새’를 결성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국악방송이 주관한 국악 경연대회 ‘21세기 한국음악 프로젝트’에서 창작곡 ‘떼루’(떼 지어 함께 하자는 뜻)를 연주했다. 결과는 대상. 송씨는 작사·작곡은 물론이고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꽹과리를 치며 상모까지 돌린다. 상을 받은 5월 이후 꾸준히 공연 의뢰가 들어왔고 함께 했던 객원 주자들은 정식 멤버가 됐다. 그는 “10년 넘게 연희 무대에 서며 들어본 적 없는 ‘앵콜’ 요청을 매번 받는다”고 했다.

끊임없이 달리고 있는 이 젊은 국악인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그는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성공에서 힌트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주 살풀이 춤 공연을 했는데, 제가 갓을 쓰고 도포만 입어도 관객석에선 ‘(케데헌의 캐릭터인) 사자보이즈 같다’는 반응이 나오더라구요. 우리가 전통의 모든 걸 고수할 필요는 없어요.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해야 저도, 국악도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