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 내용은 좋지만 이름은 낯설다

2025-12-02

[이미디어= 황원희 기자] 고소득 국가의 경제가 생산·성장보다 시민의 ‘웰빙’을 우선해야 한다는 이른바 ‘탈성장(degrowth)’ 개념에 대해 영국과 미국 국민 다수가 핵심 아이디어에는 동의하지만, 정작 ‘탈성장’이라는 이름(라벨)에는 거부감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런던정경대학(LSE)과 스페인 바르셀로나 자치대학 환경과학기술연구소(ICTA-UAB) 연구진은 영국과 미국에서 6,200명 이상을 대상으로 탈성장에 대한 인식과 수용도를 조사한 결과, 두 나라 모두에서 탈성장의 주요 정책·원칙에 대한 지지는 70%를 훌쩍 넘었지만, ‘탈성장’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지지는 20%대에 그쳤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탈성장의 핵심 아이디어와 이를 구체화한 정책·목표(유해·비필수 생산의 축소, 웰빙 우선 등) 등을 각각 라벨과 제안을 결합한 형태로 평가하도록 했다.

그 결과, ‘라벨이 있든 없든’ 탈성장의 전체 제안에 대한 지지는 영국에서 74~84%, 미국에서 67~73%로 나타났다. 즉, “성장보다는 사람과 환경의 안녕을 우선하자”, “유해하고 불필요한 생산은 줄이자”는 방향성에는 국민 대다수가 동의한 셈이다.

반면, ‘탈성장’이라는 용어에 대한 지지율은 영국 20~26%, 미국 13~28%에 그쳤다. 연구진은 “탈성장이 실제로 무엇을 포함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낮고, 사람들이 ‘소득 감소’ 같은 단편적 이미지에 갇혀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탈성장’이라는 단어만 들었을 때는 소득·일자리 축소 등 부정적인 연상을 먼저 떠올리지만, 유해 생산 축소, 자원 사용 감축, 복지·공공서비스 강화 등을 하나의 통합 제안으로 설명했을 때는 반대가 크게 줄어들었다.

LSE 심리·행동과학과 다리오 크르판 박사는 “일반적으로 인기가 없다는 통념과 달리, 우리의 연구 결과는 대중이 유해 생산을 줄이고 웰빙을 우선한다는 비전에 강하게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탈성장에 대한 저항은 ‘내용’ 때문이라기보다, 일관되고 목적 있는 정책 패키지로 접할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영국과 미국의 정치인·정책 입안자들은 시민들이 이런 논의를 반대할 것이라고 가정하기보다, 오히려 탈성장과 대안적 경제 모델에 대해 더 공개적으로 토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는 또 탈성장은 부유층에게만 손해를 주는 의제라는 흔한 주장과 다른 결과를 보여줬다. 연간 소득 수준, 소득 만족도, 경제적 안정감 등 사회경제적 지표는 탈성장 지지 여부를 크게 설명하지 못했으며, 고소득층 역시 핵심 아이디어에는 상당한 지지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오히려 지지 여부를 가르는 요인으로 기후·불평등 등 글로벌 문제를 아이디어와 행동으로 해결하려는 열망(연구진은 이를 ‘변화적 유토피아적 충동’이라 명명) 생태계의 한계와 지구 시스템의 무결성을 중시하는 세계관(일명 ‘새로운 생태 패러다임’)을 꼽았다.

연구진은 “탈성장을 둘러싼 가장 큰 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대중 커뮤니케이션에 과감히 투자하는 것, 다른 하나는 불필요한 적대감을 덜 불러일으키는 다른 용어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를 계기로 성장 이후(post-growth) 사회의 원칙과 정책을 둘러싼 집단 토론이 활발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번 연구는 그동안 “탈성장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중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통념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진다. 조사 결과는 “탈성장이라는 말 자체는 여전히 낯설고 거부감이 있지만, 그 안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와 정책 방향에는 상당한 사회적 합의가 형성돼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연구진은 “탈성장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아이디어의 내용’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어떤 이름과 이야기로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일 수 있다”며, 향후 탈성장과 웰빙 중심 경제 논의가 라벨 논쟁을 넘어 구체적 정책·전환 전략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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