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무기로 무리한 요구…방어권 없는 사측은 속수무책
HD현대중공업, 사상 최대‧업계 최고 합의안 마련해도…노조 '부결'
현대트랜시스 노조, 매출 2% 성과급 달라며 파업…현대차‧기아까지 피해
파업시 대체근로 허용, 노조 사업장 점거 금지 등 사측 방어권 부여해야
“정부는 출범 이후 노사법치를 일관되게 확립해 노동시장의 체질을 개선했습니다. 대규모 불법파업이 사라졌고, 근로손실일수가 역대 정부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며, 노조회계공시를 통해 투명성을 높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독한 시정연설을 통해 그동안의 노동개혁 성과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재계에서는 정부의 법치주의 확립 기조에 따라 불법파업이 크게 줄어든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여전히 노사 힘의 균형이 노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에서 노동법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11일 재계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산업 현장의 불법파업이 줄면서 근로손실일수도 감소했지만, 노조가 파업을 무기로 사측에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경우 사실상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점은 여전히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매년 임금 및 단체협약(임단협) 교섭 과정에서 노조의 쟁의권 확보는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진다. 사측이 수용 불가능한 요구안을 내놓고 몇 차례 의례적으로 교섭 차수를 쌓은 뒤 요구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교섭 결렬을 선언하고 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을 신청하는 게 관례화돼 있다.
쟁의조정 역시 의례적으로 이뤄지다가 노사가 권고를 수용하지 않으면 조정중지 결정이 내려진다. 이 때부터 노조는 합법적으로 파업할 수 있는 쟁의권을 갖게 된다.
쟁의권 확보 절차가 이처럼 간단한데다, 교섭에서 사측을 압박할 강력한 무기로 활용할 수 있으니 노조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반면, 사측은 노조가 파업을 무기로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경우 대응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요구를 거부했다가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면 대체인력을 투입할 수 없어 꼼짝 없이 생산차질을 감수해야 한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근로자들을 투입해 일부 생산라인을 가동하는 것도 노조가 사업장을 점거해 버리면 불가능해진다.
이동근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은 지난달 1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산업현장 법치주의 확립을 위한 토론회’에서 “우리 법제도에서는 노조의 부당하고 편법적인 요구를 막을 방안이 마땅치 않아, 회사가 노조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면 노조의 투쟁에 직면하게 되고, 노조의 힘에 눌려 편법적인 요구를 수용하면 부당노동행위로 처벌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국제 무대에서 우리와 경쟁하고 있는 주요 국가들 가운데 노동조합의 사업장 점거를 허용하거나 노조의 파업시 대체근로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면서 “노사간 힘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낡은 노동법 아래에서 우리 기업들이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고 미래세대의 일자리를 만들어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밝혔다.
이런 구조는 노조 집행부를 더욱 강성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집행부가 사측과 합리적인 선에서 합의안을 도출할 경우 쟁의권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며 조합원들의 찬성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2년 임기의 노조위원장과 집행부는 잠정합의안이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부결되면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는다.
실제, HD현대중공업은 지난 6일 역대 최대 인상폭이자 업계 최고 조건인 기본급 12만9000원 인상(호봉승급분 3만5000원 포함), 격려금 450만원(상품권 50만원 포함) 등의 조건으로 합의안을 마련했으나, 8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59.67%의 반대로 부결됐다.
HD현대중공업 노조(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지부)는 8월 28일 중앙쟁대위 출범 이후 20일 넘게 파업을 벌였다. 업계에서는 ‘파업을 더 지속해 사측을 압박하면 더 받아낼 수 있다’는 학습효과가 부결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사측의 방어권이 전무하다는 점을 악용해 법적 한도 내에서 사측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노조의 편법 투쟁 전략도 점차 고도화되고 있다.
HD현대중공업 노조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따른 임금손실을 우려해 파업 참여율이 낮다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주요 물류 거점을 점거하는 방식의 ‘물류파업’으로 조업 차질을 유도했다.
현대자동차그룹 산하 자동차 부품 계열사인 현대트랜시스 노조(금속노조 충남지부 현대트랜시스 서산지회)는 사측에 전년도 매출액의 2%를 성과급으로 지급할 것을 요구하며 한 달 넘게 파업을 벌였다.
이같은 장기 파업은 현대트랜시스뿐 아니라 그룹 내 완성차 업체이자 대주주인 현대차‧기아의 생산 차질로도 이어져 사측에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현대트랜시스에서 만드는 변속기 공급이 한 달 넘게 중단되며 재고 소진으로 완성차 일부 모델의 생산도 멈추게 된 것이다.
노조가 요구하는 전년도 매출액의 2%는 약 2400억원으로, 이는 지난해 현대트랜시스 전체 영업이익 1169억원의 2배에 달하는 규모다. 사측이 이정도 금액을 지급하려면 영업이익의 전부를 성과급으로 지급하고도 같은 수준의 빚을 내야 한다며 수용 불가 입장을 밝히자 모기업이자 고객사를 압박하는 편법을 쓴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결국 노조는 지난 8일 파업을 마지막으로 11일부터 출근을 재개했지만 이미 심각한 타격을 입은 현대트랜시스 사측은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해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 임원의 급여 20%를 반납키로 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불법 파업을 엄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산업현장에서 노조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노사관계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파업시 대체근로를 허용하고 노조의 사업장 점거를 금지하는 등 사측의 방어권이 보장돼야 사측이 노조의 불합리한 요구에 휘둘리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