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상맞은 서정주, 화난 김기영…무난한 사진은 없었다

2025-11-20

지난달 타계한 사진작가 육명심의 세계

새벽에 일어나 식구가 먹을 밥을 지어놓고 혼자 집을 나오는 80대 남자. 게다가 일어나는 시간이 새벽 세 시, 하는 일이 명상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은 아니다. 지난달에 타계한 사진작가 육명심 이야기이다.

10년 전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간 경험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그는 80이 조금 넘은 나이였는데, 정년퇴직 이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작업실로 출근하는 것이 일과였다.

박두진·황순원 등 예술가 초상 연작

한국 원형 찾는 ‘백민’ ‘장승’으로 발전

무당·장승 찍으러 시골길 다닐 때

고생해야 예의라며 승용차 안 타

대상과 교감해야 한다는 사진 철학

동등한 위치에서 인간적 개성 포착

일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만나왔다. 그중에서도 유독 사진작가들은 남다른 미감과 수집 취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이런 작가의 작업실은 아름답거나 흥미로운 물건으로 가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육명심의 오피스텔은 수도승의 방처럼 소박했다. 참선을 위한 방석이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스님이었던 아버지 7세 때 여의어

1932년생인 육명심은 출생부터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는 스님이었다. 어려서 명이 짧다는 얘기를 듣고 절에 맡겨진 후 그대로 출가한 경우였다. 그런데 위의 형님들이 대를 잇지 못하자 부모가 불러 육명심의 어머니와 결혼을 시켰다고 한다. 결혼 몇 달 후, 그는 ‘아이를 낳으면 이름은 명심으로 지으라’는 쪽지만 남기고 떠났다.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일곱 살이 되던 해, 절에서 부고 소식이 들려 왔다.

어머니와 단둘이 어렵게 살던 육명심은 열두 살 때부터 막연히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마저 절에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는지, 어머니는 차라리 목사가 되라고 아들을 설득했다. 그는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했으나 곧 자퇴하고 스물다섯 살에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영어를 배워 미국의 신학대학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대학 생활이 그를 바꾸어 놓았다. 1학년 교양 국어 수업에서 교수인 박두진 시인의 권유로 시를 습작, 제1회 연세문학상을 수상했다. 돈이 없어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문학에 심취하고 철학 강의를 들으며 동양철학에 몰두했다. 연극에 출연하기도, 직접 연출을 맡기도 했다. 인문학과 예술의 세계를 알게 되면서 신학에 대한 마음은 자연스럽게 접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하고 결혼을 했다. 그런데 서양화가 이동훈의 딸이었던 아내의 취미가 사진이었다. 아내가 가져온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그는 모든 것을 혼자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어와 영어로 된 사진사 책을 구해 공부했는데, 이때 독학으로 배운 사진 지식이 앞날을 바꾸어 놓았다. 탄탄한 인문학적 배경과 역사적 지식을 토대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교육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육명심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 사진사를 정리하고 해외 중요 사진가들을 국내에 소개했다. 잡지에 칼럼도 쓰고 책도 여러 권 집필했다. 마흔 살에는 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서라벌 예술대학(지금의 중앙대 예술대학)에서 이론을 가르쳤다. 그 전에 이미 동아국제사진살롱에 입선, 사진작가로 데뷔한 후였다.

그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이다. 대학 은사인 박두진 시인의 시집에 실릴 사진을 찍어준 것이 계기였다. 이 사진이 소문이 나면서 박목월·피천득·황순원 등 문인을 연달아 찍고, 나중에는 화가와 조각가 등으로 범위가 확장되었다.

‘예술가의 초상’은 육명심 자신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작업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대중 앞에선 수줍고 말수 적어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인생이 전반과 후반으로 완전히 나뉘는 듯한 변화를 겪었다. 그 전까지는 내면의 열등감 때문에 매사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일대일로 만나 사진을 찍다 보니 누구를 만나도 소통이 되고, 소통되면 예술적 직관력이 생기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고백은 그의 에세이에 실려 있는데, 실제로 10년 전 그의 작업실을 찾아갔을 때 받은 인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 전에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는 분명 수줍음을 타는 듯, 말수가 적고 뒤로 물러나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작업실로 찾아가 대면하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깜짝 놀랐다.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과 흡입력 있는 말투가 비범했다.

육명심이 유난히 초상 사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일대일에 강한, 그의 이런 캐릭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예술가의 초상’은 찍는 자와 찍히는 자가 모두 개성 강한 예술가라는 점에서 특출나다. 한마디로 두 개의 강렬한 예술적 자아가 부딪쳐 만들어낸 화학작용의 소산물인 셈이다. 마음이 통해서 완전히 교감하기도 하고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시리즈의 첫 주인공, 박두진 시인에 대해서는 애정과 존경이 가득했다. 육명심의 말에 따르면 박두진은 평소 성격이 온화하고 자비로웠다. 학생이 수업에 자주 빠져도 떼를 쓰면 학점을 주는 마음 약한 교수였다. 그런데 4·19 시위 현장에서는 학생 데모대를 맨 앞줄에서 이끄는 강단 있는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존경하는 은사를 그는 따뜻한 성품과 인간적 깊이가 드러나는 모습으로 담았다. 박두진은 글을 쓰기 전, 항상 이 자세로 기도를 올리고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반대로 영화감독 김기영의 사진은 팽팽한 기 싸움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촬영 당시를 작가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이 사진을 찍을 때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 수 있을 때까지 끌었다. 욱하는 기분 나쁜 표정이 얼굴에 더 강하게 나타나도록 말이다. 결과적으로 모델의 까다롭고 무뚝뚝한 개성이 잘 드러났다.”

대면과 소통에 강했던 육명심의 재능은 피사체와 눈을 맞춘 정면 사진에서 특히 빛났다. 1977년에 시작한 ‘백민’은 우리 옛 삶의 모습을 담은 촌부나 유생, 박수와 무당을 찾아다니며 촬영한 시리즈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시기에 그는 ‘농경 사회의 마지막 세대’로서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시대의 얼굴들을 기록했다.

이 시리즈에서는 무당 박용녀를 찍은 사진이 특히 유명하다. 육명심은 강원도에서 동해안 별신굿을 본 후 이 무당의 강한 신기에 이끌렸다. 그는 소위 ‘기가 센’ 인물과 교감하는 것을 즐겼고, 대상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통찰력이 뛰어났다. 경북 안동에서 노부부를 촬영한 사진도 예사롭지 않다. ‘남존여비’라는 단어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은 인물들의 모습이 절묘하다.

한편 ‘백민’에서 한국 얼굴의 원형을 기록하려는 노력은 ‘장승’ 시리즈로 이어졌다. 1980년대, 동네 어귀마다 세워져 있던 장승이 하나둘 사라져 가던 때였다. 육명심은 장승에 각별한 애정을 느꼈다. 그가 볼 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 긴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풍경의 일부가 되는 장승은 인간과 자연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백민과 장승 시리즈를 찍으러 다닐 때는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었다. 절대로 승용차를 타고 가지 않는다는 것. 대체로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외진 장소들이었지만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시골길을 걸어 다니며 불편을 자초했다. 고생스럽게 찾아가야 시간과 얼굴을 내준 상대에게 죄송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촬영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찍은 서정주 시인의 사진을 두고 한 문학계 인사가 나무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을 한낱 시골 농사꾼처럼, 그것도 마치 볼일을 보는 것 같은 궁상맞은 꼴로 찍었냐고.

지위고하 막론하고 똑같이 존중

육명심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를 찍더라도 그 사람의 인간적인 개성에 집중했다. 유명 예술가나 시골길에서 만난 노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생각은 사실 종교와 철학에 심취하면서 형성된 가치관에 기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신을 포함한 일체가 한낱 수단일 뿐이며 이들이 동원되는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생명뿐”이었다.

육명심은 결국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평등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교감을 이룰 때 좋은 사진이 나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사진은 곧 소통이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소통의 전제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었다. 누구를 만나도 대등한 관계를 맺으며 존중의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뤄낸 예술적 성취의 비결이었다.

누구나 소통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소통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관계는 언제나 미묘하게 변한다.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는 관계의 평형점은 때로는 힘들고 불편한 길을 자초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평형점에서 드물게 일어나는 완전하고도 짜릿한 소통은 놀라운 결실을 맺기도 한다. 육명심의 사진을 보며,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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