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와이에 있는 국립태평양묘지는 흔히 ‘펀치볼’(punchbowl·그릇)이라고 불린다. 높이 150m의 원뿔 모양 사화산의 분화구, 즉 그릇 모양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서 전사한 미군 장병들이 잠들어 있다. 미군 소속인 것은 확실한데 시신의 훼손 정도가 심해 신원을 알 수 없는 이른바 무명용사(Unknown Soldier)도 여럿 안치돼 있다. 그 상당수는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유해를 찾지 못한 실종자들이다. 그런데 2021년 3월 이 태평양묘지에 묻힌 시신 한 구의 신원이 확인됐다. 가톨릭 신부이자 군종장교로서 6·25 전쟁에 참전한 에밀 카폰(1916∼1951) 대위가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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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폰은 미국 본토 중앙 캔자스주(州)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40년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1950년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대위 계급장을 단 군종장교였다. 미국이 참전을 결심함에 따라 카폰은 1950년 7월 미 육군 제1기병사단 소속으로 한국에 파병됐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북진하는 미군 부대와 함께했다가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평안북도 벽동에 위치한 포로수용소로 끌려간 뒤 폐렴 등 병마에 시달리다가 이듬해인 1951년 5월23일 선종(善終)했다. 당시 그의 나이 고작 35세였다.
훗날 수용소에서 풀려난 미군 장병들의 증언을 통해 카폰의 선종은 확인되었으나 정작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미군 당국은 그가 수용소 부근 어딘가에 묻힌 것으로 추정했다. 고인의 전우들에 따르면 카폰은 부대에 철수령이 내려진 뒤에도 후퇴를 마다하고 부상병들 곁에 남았다. 포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는 병사들의 평온한 임종을 위해 기도했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이후 카폰은 환자들의 옷을 대신 세탁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포로들을 보살폈다. 2013년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고인에게 명예훈장을 추서했다. 이는 미국에서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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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후 70년 만에 유해가 확인된 카폰의 장례미사는 2021년 9월 고향인 캔자스주의 한 성당에서 엄수됐다. “중공군이 그분을 ‘순교자’로 만들었지만 이제 우리는 곧 그분을 ‘성인’(聖人)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미사를 집전한 신부는 로마 교황청이 1993년 카폰을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한 사실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카폰에게 ‘가경자’(可敬者) 호칭을 부여했다. 이는 가톨릭에서 성인, 복자(福者) 다음으로 존엄한 지위에 해당한다. 이로써 장차 복자를 거쳐 성인으로 승격할 길이 열린 셈이다. 그간 ‘6·25 전쟁의 성인’으로 불린 카폰이 진짜 성인으로 추앙될 날도 머지않았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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