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남과의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데,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모든 관계는 믿음을 전제로 형성된다. 법은 사회적 믿음을 강제하기 위해 짜 맞춰 명문화한 조항에 불과하다. 타인을 믿고자 하는 최소한의 인정마저 없다면 법이 다 무슨 소용! 법을 깨부수기로 한다면 하루아침이면 족하다.

불신은 속단과 억측으로부터 비롯되고 속단과 억측은 자신의 ‘촉(觸)’에 대한 과신에 기인한다. ‘촉이 좋다’를 국어사전은 “감각이나 통찰력이 뛰어나다”고 풀이하고 있다. ‘내 촉이 얼마나 정확한데 내 앞에서 감히 ×수작이야?’ 자신의 촉을 과신한 나머지 남이 나를 속이리라 속단하고, 남도 나를 믿지 않으리라고 억측하는 순간 사회적 믿음은 사라지고 난세가 시작된다. 이에 공자는 “속이리라 속단하지 말고, 믿지 않으리라 억측하지 말라”고 하면서 “진정한 현자만이 그런 속임의 조짐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촉에 대한 과신은 대개 도끼로 제 발등 찍기로 끝난다. 설령 내 촉에 상대의 속임이 잡히더라도 슬며시 눈감아 주는 아량이 오히려 상대를 감동시킨다. 촉은 적을 감시하는 보초병이다. 평생 촉을 세워야 하는 보초병으로 살지 말고, 듬직한 믿음의 장군으로 살아볼 일이다.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