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이 제안하는 의료대란 해법 “공공의료에서 찾다”
① 닮았지만 서로 다른, 일본 공공의료 현황과 방향 | 이요한
② 시장 중심 의료, 미국 공공의료 도전과 변화 | 정혜주
③ 건강이 인간의 기본권, 이탈리아 국영의료 | 문정주
④ 영국 NHS의 위기, 의미와 변화는? | 이안 그리너, 마틴 파월

[울산저널]이승진 시민기자= 문정주 가정의학과 전문의(전 서울의대 겸임교수)는 <월간복지동향> 기고에서 “2014년까지 십 년간 나는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에서 우리나라 공공병원을 평가하고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고 밝혔다. 문 전문의는 “공공의료를 강화한다는 목표는 뜻깊었지만 실제로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을 바라보며 안간힘을 쓰는 일이었다”면서 “우리나라에서 의료는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팔듯 거래되고 수익 논리가 의료 현장을 지배하며 공공성은 대수롭지 않은 듯 여겨진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공공의료 체계가 얼마나 취약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어 “정부가 관리하는 국민건강보험이 있다 해도 환자가 이용한 의료비 일부를 내주는 데 머물 뿐 이윤을 추구하는 병원을 통제하지 못한다”면서 “시장에서 승자는 전체 의료기관의 95%를 차지하는 사립병원”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 병원들은 건강보험 수가가 너무 낮다고 불평하면서도 매출을 올리고 번성한다”고 꼬집은 뒤 “전체 의료기관의 5%에 불과한 공공병원은 사방에서 손가락질을 받는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진료가 부실하다고,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다고 타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문 전문의는 이탈리아 좌파와 우파가 함께 구축한 국영의료를 오랜 기간 연구했다. 그에 따르면 서유럽에서 의료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독일을 비롯해 7개 나라가 채택한 ‘사회보험 방식’은 지역 또는 직종별 의료보험 조합이 보험료를 거둬 의료체계를 관리하는 제도다. 반면 영국을 비롯해 10개 나라가 시행하는 ‘국영의료’는 세금으로 국가가 직접 의료를 운영하는 제도다. “두 제도는 의료 운영 주체가 조합과 국가로 구분되지만 누구나 의료를 이용할 수 있게 사회가 보장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고 해석했다.
이 가운데 이탈리아는 국영의료를 1978년에 도입했고 ‘건강을 인간의 기본권으로 보호한다’는 선언은 1948년 헌법에 이미 명시돼 있었다. 68혁명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소련과 결별한 이탈리아 공산당은 서유럽형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집권당인 기독교민주당(기민당)에 연정을 제안했다. 시민들의 불만이 쌓여 나타나는 파시즘(전체주의)을 막으려면 기민당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연정의 대표적 결실이 국영의료다. 당시 이탈리아 의료보장은 직업, 직장에 따라 보장 내용과 범위가 천차만별로 직장이 없는 미가입자 인구가 7%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기민당과 공산당은 의료보장 개혁에 나섰고 1978년 12월 ‘국영의료법’을 제정했다. 법의 첫 장 첫 절에 “공화국이 국영의료를 통해 건강을 개인의 기본권이자 집단 공동의 관심사로 보호한다”고 선언한 뒤 “국영의료는 개인적 특성이나 사회적 조건을 구별하지 않고 인구 전체에게,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증진하고 유지하며 회복하게 하는 모든 기능·시설·서비스·활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정의한다. 우리 헌법, 의료법, 보건의료기본법, 공공보건의료법, 국민건강보험법에는 존재하지 않는 문구다.
이탈리아 국영의료는 중앙정부가 목표, 원칙, 필수 서비스 범위를 정하고 국가 보건의료계획을 세우며 세금을 배분한다. 의료체계 운영 실무 책임과 권한은 20개 주 정부에 있다. 각 주는 권역별 의료본부(Azienda Sanitaria Locale, 이하 ASL)를 두고 질병 예방과 같은 공중보건사업을 시행하고 일차의료, 동네 외래진료센터, 직영병원 등을 관리한다. 국영의료 예산의 5%를 공중보건사업에, 50%를 일차의료 등 동네의료에, 45%를 병원의료에 배분한다. 이탈리아 국영의료 운영체계는 의료에 있어 철저하게 지방분권을 원칙으로 한다.
누구에게나 국영의료 플랫폼 ‘가정의’가 있고 질병 예방, 진료, 상담, 왕진을 제공한다. 10분에서 40분 사이의 상담을 하되 아파서 이동할 수 없을 때는 가정의가 방문한다. 이 서비스는 모두 무료다. 환자와 관련된 진단검사 결과, 전문의 진료, 응급진료, 퇴원 보고서를 받아보고 진료에 반영한다. 전체 의사 가운데 30%가 의과대학 졸업 후 3년간 주 정부가 정한 일차의료 수련을 마치면 가정의로서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 가정의는 자영업자지만 보수는 등록 인원당 금액을 받는다. 우리나라처럼 의료비를 늘리기 위한 행위별 수가제는 적용하지 않는다.
동네마다 존재하는 ‘외래진료센터’는 우리나라 개인 의원, 큰 병원, 보건소와 다르다. 이 센터는 ASL이 설치한 공공시설이다. 전문 과목별 진료와 진단검사를 수행하고 가정의가 의뢰하면 환자가 여기서 전문의를 만난다. 전문의 역시 자영업자지만 보수는 ‘시간당 정액’으로 지급된다. 이에 따라 넉넉한 시간을 들여 진료하고 상담할 수 있다. 본인부담금은 상한선이 36유로(약 5만 원)다. 전문의 진료뿐만 아니라 혈액검사, 영상의학적 검사 등 진단검사를 받을 때도 이 상한선을 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껍데기만 남은 ‘지역사회 통합돌봄’(커뮤니티 케어)에 있어서도 의료와 복지가 효과적으로 연결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중증 환자를 위한 ‘통합 가정 돌봄’의 경우 가정의가 돌봄을 요청하고 ASL이 기초 자치단체와 협력해서 팀을 제공한다. 가정의 왕진, 간호사의 방문간호, 요양보호사의 배뇨 배변 및 활동 보조, 물리치료사의 운동치료, 언어치료사의 언어재활, 사회복지사의 주거 관리지원, 복지단체의 음식 공급 등이 포함된다. 이는 국영의료의 필수 서비스고 모두 무료다.
이탈리아의 공공병원 병상은 전체의 80%를 차지한다. 특정 의사는 특정 병원에 소속되지 않고 네트워크를 통해 이동하면서 진료한다. 병원에는 진료비 수납 창구가 없다. 건강보험을 청구하는 일도 없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외과 전문의가 어느 병원에든 달려가거나 날아가서 위급한 환자를 수술하는 체계다. 산간벽지에 입원한 환자가 의료진 간 연결에 힘입어 시내 병원으로 이송돼 첨단 치료를 받는다. 연간 예산이 지급되는 병원 직원들은 경영 적자나 임금체불 불안 없이 안정적으로 일한다. 이탈리아가 실현한 국영의료의 실체다.
이승진 시민기자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